제주복신미륵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서 양쪽에 있는 석상(石像). 여기에 기원하면 사람들에게 재복을 내려주는 것으로 관념된다. 1971년 8월 25일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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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서 양쪽에 있는 석상(石像). 여기에 기원하면 사람들에게 재복을 내려주는 것으로 관념된다. 1971년 8월 25일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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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식
특징복신미륵에 대한 신앙은 민간의 개인신앙, [마을](/topic/마을)신앙, 불교가 결합된 양상을 보여 준다. 개인, 마을, 사찰이 하나의 대상을 두고 제각기 의례를 벌이는 점도 주목된다. 동한두기마을에서 [미륵제](/topic/미륵제)를 지낼 때 돼지고기를 바친다는 점도 특별하다. 사찰 경내에 돼지고기를 들이고 [미륵불](/topic/미륵불)에게 [제물](/topic/제물)로 바친다는 점에서 서자복은 더 이상 불교적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특징복신미륵에 대한 신앙은 민간의 개인신앙, [마을](/topic/마을)신앙, 불교가 결합된 양상을 보여 준다. 개인, 마을, 사찰이 하나의 대상을 두고 제각기 의례를 벌이는 점도 주목된다. 동한두기마을에서 [미륵제](/topic/미륵제)를 지낼 때 돼지고기를 바친다는 점도 특별하다. 사찰 경내에 돼지고기를 들이고 [미륵불](/topic/미륵불)에게 [제물](/topic/제물)로 바친다는 점에서 서자복은 더 이상 불교적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서 양쪽에 있는 석상(石像). 여기에 기원하면 사람들에게 재복을 내려주는 것으로 관념된다. 1971년 8월 25일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서 양쪽에 있는 석상(石像). 여기에 기원하면 사람들에게 재복을 내려주는 것으로 관념된다. 1971년 8월 25일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칭[미륵불](/topic/미륵불)(彌勒佛), 자복미륵(資福彌勒), 자복신(資福神), 큰어른 등으로도 불린다. 동쪽의 것은 동자복(東資福)·동미륵(東彌勒), 서쪽의 것은 서자복(西資福)·서미륵(西彌勒)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불상과는 다른 모양이지만 ‘미륵불’, ‘자복미륵’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복미륵, 자복신 등으로 불린 데에서는 재물과 복을 내려주는 존재로 숭앙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큰어른’이라는 명칭은 그 높이가 3m에 이를 정도로 큰 데서 비롯됐음을 말해 준다.
이칭[미륵불](/topic/미륵불)(彌勒佛), 자복미륵(資福彌勒), 자복신(資福神), 큰어른 등으로도 불린다. 동쪽의 것은 동자복(東資福)·동미륵(東彌勒), 서쪽의 것은 서자복(西資福)·서미륵(西彌勒)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불상과는 다른 모양이지만 ‘미륵불’, ‘자복미륵’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복미륵, 자복신 등으로 불린 데에서는 재물과 복을 내려주는 존재로 숭앙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큰어른’이라는 명칭은 그 높이가 3m에 이를 정도로 큰 데서 비롯됐음을 말해 준다.
내용복신미륵은 제주시 동서 양쪽에 마주하고 세워져 있는 석상을 함께 이른다. 동쪽의 것은 동자복, 서쪽의 것은 서자복이다. 이들 모두 옛 제주성 바깥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동자복은 제주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주시 건입동 만수사 터에 있다. 이곳에는 근래까지 개인주택이 있을 때 동자복은 개인주택 울타리 안, 건물 뒤쪽의 7평 정도 되는 좁은 공간에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워 관련 의례도 전승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2009년에 제주시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야외공원을 조성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서자복은 제주도 민속자료 제1-2호이며, 제주시 용담1동 용화사라는 절 안에 있다. 서자복 곁에는 남근 모양의 석상이 있다. 석상은 높이 75㎝, 둘레 100㎝이다. 이를 동자승, 동자미륵이라고 한다. 이 석상에 걸터앉아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설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작은 석상은 남근석으로 관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자복은 남성, 동자복은 여성이라고 관념한다는 보고도 있다. 이것도 서자복을 남근석이라고 보는 데 근거를 둔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도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고 하여 이 동자복과 서자복에 기원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절에서는 음력 이월과 동짓달 보름에 서자복을 위하여 법당에서 예불을 드린다. 그런가 하면 용담1동 동한두기[마을](/topic/마을)에서 포제를 지낼 때는 그에 앞서 서자복 앞에서 간단히 제사를 지낸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자정(0시) 가까워지면 [금줄](/topic/금줄)을 걷어 내고 [미륵제](/topic/미륵제)의 [제관](/topic/제관)과 집사들이 용화사로 간다. 이때는 미리 정해 둔 [헌관](/topic/헌관), [독축](/topic/독축), 집사만 참여한다. 먼저 미륵 앞의 제단에 돼지머리와 간단한 제물을 올린다. 제사는 비교적 간단히 지낸다. [단작](/topic/단작)을 올리고 고축한 뒤 잡식하여 마친다. 이때의 [축문](/topic/축문)에는 ‘미륵존불(彌勒尊佛)’이라 하고 마을의 온갖 일을 망라하여 기원 사항으로 적는다.

복신미륵은 제주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으리라고 추정된다. 복신미륵이 제주성 바깥의 동서에 쌍으로 존재하고, 둘 모두 사찰 경내에 있고, 서로 마주서서 제주성 안을 굽어보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에서 제주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풍수](/topic/풍수)지리설로 풀이하기도 한다. 복신미륵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제주성의 양쪽을 감싸 흐르는 줄기로 이는 곧 좌청룡 우백호의 기가 모이는 곳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곳에 미륵을 마주 세움으로써 제주성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풀이하는 셈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동서의 미륵 가운데 서자복만 제 구실을 하고 있다. 동자복은 거의 잊혀서 유물로만 남아 있다. 이것은 서자복에 대하여 개인, 마을, 사찰에서 저마다 의례를 벌이는 것과 대조적인 상황이다. 이제 개인집 울타리에 갇혔던 동자복이 공원화됨으로써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한편 복신미륵이 지역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음은 오늘날 동한두기마을의 포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한두기마을에서는 마을을 수호해 주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마을제사를 지낼 때마다 기원하고 있다. 후대에는 주로 수복을 이루어 주는 것으로 관념되었다. 크게 보면 공동체신앙이 개인신앙으로 바뀌어 간 셈이다.
내용복신미륵은 제주시 동서 양쪽에 마주하고 세워져 있는 석상을 함께 이른다. 동쪽의 것은 동자복, 서쪽의 것은 서자복이다. 이들 모두 옛 제주성 바깥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동자복은 제주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주시 건입동 만수사 터에 있다. 이곳에는 근래까지 개인주택이 있을 때 동자복은 개인주택 울타리 안, 건물 뒤쪽의 7평 정도 되는 좁은 공간에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워 관련 의례도 전승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2009년에 제주시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야외공원을 조성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서자복은 제주도 민속자료 제1-2호이며, 제주시 용담1동 용화사라는 절 안에 있다. 서자복 곁에는 남근 모양의 석상이 있다. 석상은 높이 75㎝, 둘레 100㎝이다. 이를 동자승, 동자미륵이라고 한다. 이 석상에 걸터앉아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설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작은 석상은 남근석으로 관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자복은 남성, 동자복은 여성이라고 관념한다는 보고도 있다. 이것도 서자복을 남근석이라고 보는 데 근거를 둔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도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고 하여 이 동자복과 서자복에 기원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절에서는 음력 이월과 동짓달 보름에 서자복을 위하여 법당에서 예불을 드린다. 그런가 하면 용담1동 동한두기[마을](/topic/마을)에서 포제를 지낼 때는 그에 앞서 서자복 앞에서 간단히 제사를 지낸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자정(0시) 가까워지면 [금줄](/topic/금줄)을 걷어 내고 [미륵제](/topic/미륵제)의 [제관](/topic/제관)과 집사들이 용화사로 간다. 이때는 미리 정해 둔 [헌관](/topic/헌관), [독축](/topic/독축), 집사만 참여한다. 먼저 미륵 앞의 제단에 돼지머리와 간단한 제물을 올린다. 제사는 비교적 간단히 지낸다. [단작](/topic/단작)을 올리고 고축한 뒤 잡식하여 마친다. 이때의 [축문](/topic/축문)에는 ‘미륵존불(彌勒尊佛)’이라 하고 마을의 온갖 일을 망라하여 기원 사항으로 적는다.

복신미륵은 제주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으리라고 추정된다. 복신미륵이 제주성 바깥의 동서에 쌍으로 존재하고, 둘 모두 사찰 경내에 있고, 서로 마주서서 제주성 안을 굽어보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에서 제주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풍수](/topic/풍수)지리설로 풀이하기도 한다. 복신미륵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제주성의 양쪽을 감싸 흐르는 줄기로 이는 곧 좌청룡 우백호의 기가 모이는 곳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곳에 미륵을 마주 세움으로써 제주성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게 만든 것이라고 풀이하는 셈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동서의 미륵 가운데 서자복만 제 구실을 하고 있다. 동자복은 거의 잊혀서 유물로만 남아 있다. 이것은 서자복에 대하여 개인, 마을, 사찰에서 저마다 의례를 벌이는 것과 대조적인 상황이다. 이제 개인집 울타리에 갇혔던 동자복이 공원화됨으로써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한편 복신미륵이 지역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음은 오늘날 동한두기마을의 포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한두기마을에서는 마을을 수호해 주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마을제사를 지낼 때마다 기원하고 있다. 후대에는 주로 수복을 이루어 주는 것으로 관념되었다. 크게 보면 공동체신앙이 개인신앙으로 바뀌어 간 셈이다.
역사복신미륵은 관련 기록이 거의 없어 현재로서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추정의 근거는 동자복이 있는 자리에 고려시대 만수사(萬壽寺)라는 절이 있었고, 서자복이 있는 용화사가 고려시대 해륜사(海輪寺)라는 절이 있던 자리라는 점이다. 이 두 절은 조선 숙종대에 이르러 무불파괴시책(巫佛破壞施策)에 의해 불타고 미륵만 남게 되었다. 미륵의 형태에서 고려후기 불상이 통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 근거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아직 분명한 근거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역사복신미륵은 관련 기록이 거의 없어 현재로서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추정의 근거는 동자복이 있는 자리에 고려시대 만수사(萬壽寺)라는 절이 있었고, 서자복이 있는 용화사가 고려시대 해륜사(海輪寺)라는 절이 있던 자리라는 점이다. 이 두 절은 조선 숙종대에 이르러 무불파괴시책(巫佛破壞施策)에 의해 불타고 미륵만 남게 되었다. 미륵의 형태에서 고려후기 불상이 통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 근거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아직 분명한 근거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형태커다란 현무암을 깎아 [돌하르방](/topic/돌하르방) 형태로 다듬었다. [모자](/topic/모자), 머리, 몸통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비율이 이 지역 돌하르방의 모습과 유사하다. 다만 몸통에는 소맷자락 모양이 뚜렷해 돌하르방과 매우 다르다. 특히 동자복은 손 모양도 일반적인 돌하르방의 형태와 다르다. 동자복은 높이 286㎝, 얼굴 길이 161㎝, 아랫몸 둘레 662㎝이다. 서자복은 높이 273㎝, 얼굴 길이 135㎝, 아랫몸 둘레 315㎝이다. 동자복은 노출되어 있으나 서자복은 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형태커다란 현무암을 깎아 [돌하르방](/topic/돌하르방) 형태로 다듬었다. [모자](/topic/모자), 머리, 몸통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비율이 이 지역 돌하르방의 모습과 유사하다. 다만 몸통에는 소맷자락 모양이 뚜렷해 돌하르방과 매우 다르다. 특히 동자복은 손 모양도 일반적인 돌하르방의 형태와 다르다. 동자복은 높이 286㎝, 얼굴 길이 161㎝, 아랫몸 둘레 662㎝이다. 서자복은 높이 273㎝, 얼굴 길이 135㎝, 아랫몸 둘레 315㎝이다. 동자복은 노출되어 있으나 서자복은 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의의제주도에서 공동체신앙이 개인신앙으로 바뀌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런 가운데 복신미륵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님이 확인된다.

제주도에는 곳곳에 자그마한 미륵돌을 모시고 기자(祈子) 축원을 하는 당들이 있다. 서자복의 작은 석상은 이와 같은 당신앙과 관련이 있다. 본래 서자복도 기자치성과는 무관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당에서처럼 작은 석상을 곁에 두고 아들 낳기를 기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朝鮮巫俗の硏究 下 (赤松智城·秋葉隆, 大阪屋號書店, 1937)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주시 (제주시, 1998)
용담동지 (용담동지편찬위원회, 2001)
민속사진집 령 (현용준, 각, 2004)
의의제주도에서 공동체신앙이 개인신앙으로 바뀌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런 가운데 복신미륵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님이 확인된다.

제주도에는 곳곳에 자그마한 미륵돌을 모시고 기자(祈子) 축원을 하는 당들이 있다. 서자복의 작은 석상은 이와 같은 당신앙과 관련이 있다. 본래 서자복도 기자치성과는 무관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당에서처럼 작은 석상을 곁에 두고 아들 낳기를 기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朝鮮巫俗の硏究 下 (赤松智城·秋葉隆, 大阪屋號書店, 1937)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주시 (제주시, 1998)
용담동지 (용담동지편찬위원회, 2001)
민속사진집 령 (현용준, 각, 2004)
문화재관리국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14-무의식편1983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새남굿1998
국립문화재연구소경기도 도당굿1999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서울굿 음악연구하을란2001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서울새남굿의 삼현육각 연구김소리2004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취타계열 음악 연구김정림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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