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웅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웅
짚을 재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 한자로 추령(芻靈), 초우인(草偶人)이라고 적는다. 민속에서는 나후직성에 든 인물을 대신하는 존재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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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을 재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 한자로 추령(芻靈), 초우인(草偶人)이라고 적는다. 민속에서는 나후직성에 든 인물을 대신하는 존재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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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익
정의짚을 재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 한자로 추령(芻靈), 초우인(草偶人)이라고 적는다. 민속에서는 나후직성에 든 인물을 대신하는 존재로 사용된다.
정의짚을 재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 한자로 추령(芻靈), 초우인(草偶人)이라고 적는다. 민속에서는 나후직성에 든 인물을 대신하는 존재로 사용된다.
내용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사람의 운수가 별자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관념이 전한다. 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해의 운수를 맡아보는 직성은 토직성(土直星)을 비롯해 수직성(水直星), 금직성(金直星), 일직성(日直星), 화직성(火直星), 계도직성(計都直星), 월직성(月直星), 목직성(木直性), 나후직성(羅睺直星) 등으로 모두 아홉이다. 이들 직성 가운데 나후직성은 처용직성 또는 제웅직성으로 불린다. 나후직성에 든 사람은 그해에 액운을 맞이한다고 하여 불길하게 여긴다. 이에 따라 액운을 거두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제웅이 출현하게 되었다.

사람이 처음 나후직성에 드는 나이는 남자 10세, 여자 11세이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9년을 주기로 나후직성의 해가 반복된다. 따라서 이해에는 나후직성의 액운을 거두어 내기 위해 제웅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는 제웅의 머리에 동전을 넣어 길가에 버리는 주술적 행위로 액운을 쫓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풍속은 매년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관습적으로 이루어졌다.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의 기록처럼 아이들이 제웅을 만든 집 문 앞에 와서 제웅을 달라고 할 정도로 일반화된 풍속이다. 그리고 이러한 풍속에 연유하여 [제웅치기](/topic/제웅치기)라고 불리는 타추희가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의 각종 세시기를 보면 당시 제웅을 통한 액운 거두기가 얼마나 흥하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 예로 19세기 초 조운종(趙雲從)의 『세시기속』에는 “직성 든 재앙 물리치기 위한 방법 / 아이들이 문 앞에서 처용을 요구하네 / 동전 몇 닢 넣어서 짚 [인형](/topic/인형)을 내놓으면 / 밤새도록 온 거리에 채찍소리 요란하네(災直星宮禳是謀 / 踵門童隊處容求 / 持錢數葉藁人出 / 竟夜鞭聲九陌頭)”라는 칠언시가 있다. 이 시는 당시 정월 열나흗날 밤의 제웅치기 [풍경](/topic/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해 놓았다. 특히 “밤새도록 온 거리에 채찍소리가 요란하네”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제웅을 통한 액막이의 믿음을 읽을 수 있다.

타추희는 어휘 그대로 제웅[芻]을 치[打]는 놀이이다. 『[해동죽지](/topic/해동죽지)』에는 “풀로 인형을 만들어서 제사 지내고, 나후직성을 타고난 사람의 생년월일을 써 놓으면 아이들이 구걸하면서 인형을 때린다. 이것을 타제용(打祭俑)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곧 제사 지낸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 ‘제용’을 치는 것이 당시 아이들의 제웅치기 놀이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한양세시기』에는 제웅을 “처용이라 하며, 아이들이 [대문](/topic/대문)에 늘어서서 문을 치며 외치기를 ‘처용 내놓아라.’고 한다. 처용을 내놓으면 처용의 속을 뒤져서 동전을 꺼내간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집안은 그해에 재산을 허비하는 일이 없다.”고 적고 있다.

『해동죽지』의 기록은 제웅치기의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제웅의 명칭 유래에 대한 단서도 제공한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이 무렵 제웅은 ‘제사용 허수아비’인 제용(祭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용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음운변화를 겪어 오늘날과 같은 제웅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한양세시기』의 기록에는 액을 막음으로써 “그해에 재산을 보존한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나후직성이 든 해에는 구설수가 있고 재수가 없다는 포괄적 불행이 제시되는데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재산의 보존을 꼽고 있다.

이와 같은 제웅을 통한 액막이는 남성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양세시기』에는 “여자의 경우에는 허수아비 대신 종이에다 당사자의 얼굴을 그려 돈을 넣고 싸서 길이나 개천에 버려 액을 막는다.”고 적혀 있다.

1970년대 전후만 하더라도 제웅을 통한 액막이가 전국의 곳곳에서 전승되었다. 당시 정월 열나흗날 저녁이면 길가에 제물을 차려놓고 [비손](/topic/비손)하는 성인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비손을 마치면 떡 시루 옆에 놓아둔 제웅을 불태우거나 길가에 던졌다. 그러면 이튿날 아침에 청소년들이 삼거리 길가에 가서 제웅을 거두고 제웅의 몸 안에서 동전을 빼냈다. 2010년대인 지금은 제웅을 통한 액막이 풍속이 크게 쇠락하였다. 도시지역에서는 사례를 발견하기 어렵고 농어촌지역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내용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사람의 운수가 별자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관념이 전한다. 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해의 운수를 맡아보는 직성은 토직성(土直星)을 비롯해 수직성(水直星), 금직성(金直星), 일직성(日直星), 화직성(火直星), 계도직성(計都直星), 월직성(月直星), 목직성(木直性), 나후직성(羅睺直星) 등으로 모두 아홉이다. 이들 직성 가운데 나후직성은 처용직성 또는 제웅직성으로 불린다. 나후직성에 든 사람은 그해에 액운을 맞이한다고 하여 불길하게 여긴다. 이에 따라 액운을 거두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제웅이 출현하게 되었다.

사람이 처음 나후직성에 드는 나이는 남자 10세, 여자 11세이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9년을 주기로 나후직성의 해가 반복된다. 따라서 이해에는 나후직성의 액운을 거두어 내기 위해 제웅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는 제웅의 머리에 동전을 넣어 길가에 버리는 주술적 행위로 액운을 쫓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풍속은 매년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관습적으로 이루어졌다.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의 기록처럼 아이들이 제웅을 만든 집 문 앞에 와서 제웅을 달라고 할 정도로 일반화된 풍속이다. 그리고 이러한 풍속에 연유하여 [제웅치기](/topic/제웅치기)라고 불리는 타추희가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의 각종 세시기를 보면 당시 제웅을 통한 액운 거두기가 얼마나 흥하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 예로 19세기 초 조운종(趙雲從)의 『세시기속』에는 “직성 든 재앙 물리치기 위한 방법 / 아이들이 문 앞에서 처용을 요구하네 / 동전 몇 닢 넣어서 짚 [인형](/topic/인형)을 내놓으면 / 밤새도록 온 거리에 채찍소리 요란하네(災直星宮禳是謀 / 踵門童隊處容求 / 持錢數葉藁人出 / 竟夜鞭聲九陌頭)”라는 칠언시가 있다. 이 시는 당시 정월 열나흗날 밤의 제웅치기 [풍경](/topic/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해 놓았다. 특히 “밤새도록 온 거리에 채찍소리가 요란하네”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제웅을 통한 액막이의 믿음을 읽을 수 있다.

타추희는 어휘 그대로 제웅[芻]을 치[打]는 놀이이다. 『[해동죽지](/topic/해동죽지)』에는 “풀로 인형을 만들어서 제사 지내고, 나후직성을 타고난 사람의 생년월일을 써 놓으면 아이들이 구걸하면서 인형을 때린다. 이것을 타제용(打祭俑)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곧 제사 지낸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 ‘제용’을 치는 것이 당시 아이들의 제웅치기 놀이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한양세시기』에는 제웅을 “처용이라 하며, 아이들이 [대문](/topic/대문)에 늘어서서 문을 치며 외치기를 ‘처용 내놓아라.’고 한다. 처용을 내놓으면 처용의 속을 뒤져서 동전을 꺼내간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집안은 그해에 재산을 허비하는 일이 없다.”고 적고 있다.

『해동죽지』의 기록은 제웅치기의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제웅의 명칭 유래에 대한 단서도 제공한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이 무렵 제웅은 ‘제사용 허수아비’인 제용(祭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용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음운변화를 겪어 오늘날과 같은 제웅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한양세시기』의 기록에는 액을 막음으로써 “그해에 재산을 보존한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나후직성이 든 해에는 구설수가 있고 재수가 없다는 포괄적 불행이 제시되는데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재산의 보존을 꼽고 있다.

이와 같은 제웅을 통한 액막이는 남성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양세시기』에는 “여자의 경우에는 허수아비 대신 종이에다 당사자의 얼굴을 그려 돈을 넣고 싸서 길이나 개천에 버려 액을 막는다.”고 적혀 있다.

1970년대 전후만 하더라도 제웅을 통한 액막이가 전국의 곳곳에서 전승되었다. 당시 정월 열나흗날 저녁이면 길가에 제물을 차려놓고 [비손](/topic/비손)하는 성인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비손을 마치면 떡 시루 옆에 놓아둔 제웅을 불태우거나 길가에 던졌다. 그러면 이튿날 아침에 청소년들이 삼거리 길가에 가서 제웅을 거두고 제웅의 몸 안에서 동전을 빼냈다. 2010년대인 지금은 제웅을 통한 액막이 풍속이 크게 쇠락하였다. 도시지역에서는 사례를 발견하기 어렵고 농어촌지역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제웅이 어느 시기에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에 기록한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경도잡지](/topic/경도잡지)(京都雜志)』, 『세시기(歲時記)』, 『세시기속(歲時記俗)』, 『[해동죽지](/topic/해동죽지)(海東竹枝)』,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 등에서 제웅 관련 기사를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조수삼(趙秀三)의 『세시기』에 따르면 [제웅치기](/topic/제웅치기)는 중국의 송나라 때 시작되었다.

“정월 14일 밤에 성 안의 소인배가 몽둥이를 들고 [무리](/topic/무리)지어 다니는데 이를 ‘나후(羅睺)를 친다.’라고 한다. 나후는 별 이름이다. 남녀가 각기 나이로 별운을 계산한다. 나후직성에 든 사람은 짚을 엮어서 [인형](/topic/인형)을 만들고, 각기 옷을 입혀 그 안에 동전을 넣어 문을 열고 밖에다 버린다. 이를 ‘나후를 보낸다.’라고 한다. 나후를 치는 사람들은 다투어 나후를 해체하여 동전을 빼내간다. 이를 통해 액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일 년 내내 사람들에게 창피나 비웃음을 당한다고 한다. 나[후치](/topic/후치)기는 송나라 때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제웅은 처용(處容)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제웅과 처용을 동일시한 것이다. 실제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제웅이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인 처용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 한다.

“남녀의 나이가 나후직성(羅睺直星, 제웅직성)에 들면 추령(芻靈, 제웅)을 만든다. 이것을 사투리로 처용이라고 한다.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머리 안에 동전을 집어넣고 대보름날 전날인 열나흗날 초저녁에 길에다 버려 액을 막는다. 이때가 되면 아이들이 문 밖으로 몰려와서 제웅을 내어 달라고 한다. 그것을 얻으면 머리 부분을 다투어 파헤쳐 돈만 꺼내고 나머지는 길에다 내동댕이친다. 이것을 타추희(打芻戲, 제웅치기)라고 한다.
처용의 명칭은 신라 헌강왕 때 동해 용왕 아들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장악원(掌樂院) [향악](/topic/향악)부(鄕樂部)에 나오는 [처용무](/topic/처용무)(處容舞)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추령이란 처용은 빌려 온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제웅의 본디 이름은 추령이었다. 그리고 이 추령은 처용에서 빌려 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 이외에 신라시대 처용 관련 문화요소와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삼국유사](/topic/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시대의 처용이 동해 용왕의 아들이면서 역신을 쫓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향가 의 배경담에 보이듯 그는 귀신을 제압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벽사(辟邪)의 상징적 인물로 거듭난다. 그러나 이러한 면이 제웅의 액운 퇴치와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한편 제웅은 조선시대에 나후직성의 액운을 거두어내는 주술적 도구였다. 이 시대에는 별을 통해 운수를 살피고 액운을 물리치려 한 풍속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음도 확인된다.
역사제웅이 어느 시기에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에 기록한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경도잡지](/topic/경도잡지)(京都雜志)』, 『세시기(歲時記)』, 『세시기속(歲時記俗)』, 『[해동죽지](/topic/해동죽지)(海東竹枝)』,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 등에서 제웅 관련 기사를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조수삼(趙秀三)의 『세시기』에 따르면 [제웅치기](/topic/제웅치기)는 중국의 송나라 때 시작되었다.

“정월 14일 밤에 성 안의 소인배가 몽둥이를 들고 [무리](/topic/무리)지어 다니는데 이를 ‘나후(羅睺)를 친다.’라고 한다. 나후는 별 이름이다. 남녀가 각기 나이로 별운을 계산한다. 나후직성에 든 사람은 짚을 엮어서 [인형](/topic/인형)을 만들고, 각기 옷을 입혀 그 안에 동전을 넣어 문을 열고 밖에다 버린다. 이를 ‘나후를 보낸다.’라고 한다. 나후를 치는 사람들은 다투어 나후를 해체하여 동전을 빼내간다. 이를 통해 액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일 년 내내 사람들에게 창피나 비웃음을 당한다고 한다. 나[후치](/topic/후치)기는 송나라 때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제웅은 처용(處容)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제웅과 처용을 동일시한 것이다. 실제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제웅이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인 처용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 한다.

“남녀의 나이가 나후직성(羅睺直星, 제웅직성)에 들면 추령(芻靈, 제웅)을 만든다. 이것을 사투리로 처용이라고 한다. 짚으로 제웅을 만들어 머리 안에 동전을 집어넣고 대보름날 전날인 열나흗날 초저녁에 길에다 버려 액을 막는다. 이때가 되면 아이들이 문 밖으로 몰려와서 제웅을 내어 달라고 한다. 그것을 얻으면 머리 부분을 다투어 파헤쳐 돈만 꺼내고 나머지는 길에다 내동댕이친다. 이것을 타추희(打芻戲, 제웅치기)라고 한다.
처용의 명칭은 신라 헌강왕 때 동해 용왕 아들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장악원(掌樂院) [향악](/topic/향악)부(鄕樂部)에 나오는 [처용무](/topic/처용무)(處容舞)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추령이란 처용은 빌려 온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제웅의 본디 이름은 추령이었다. 그리고 이 추령은 처용에서 빌려 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 이외에 신라시대 처용 관련 문화요소와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삼국유사](/topic/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시대의 처용이 동해 용왕의 아들이면서 역신을 쫓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향가 의 배경담에 보이듯 그는 귀신을 제압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벽사(辟邪)의 상징적 인물로 거듭난다. 그러나 이러한 면이 제웅의 액운 퇴치와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한편 제웅은 조선시대에 나후직성의 액운을 거두어내는 주술적 도구였다. 이 시대에는 별을 통해 운수를 살피고 액운을 물리치려 한 풍속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음도 확인된다.
형태제웅은 짚을 재료로 만든 높이 20~30㎝ 크기의 [인형](/topic/인형)이다. 크기나 모양은 만든 사람에 따라 일정치 않지만 사람의 형상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제웅의 모양이 만든 사람에 따라 다르듯 제웅에 부착하는 사물도 조금씩 다르다.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짚으로 만든 제웅 안에 동전을 넣는 것이다. 조선시대 여러 세시기에서는 엽전 몇 닢을 제웅의 머리 또는 배 부위에 넣는다고 적고 있다.

동전을 넣는 것 외에 장식이 따르는 예도 있다. 『세시기』에 따르면 제웅에 ‘옷을 입힌다.’고 한다. 누구의 옷을 입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액운이 든 인물의 옷을 입혔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제웅을 통한 액막이에서도 나타난다. 오늘날에도 특정인이 나후직성의 액운이 든 경우 해당 인물의 [속옷](/topic/속옷)을 제웅에 입히는 일이 다수 발견된다.

이 밖에 나후직성에 든 인물의 사주를 제웅에 부착하는 예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제웅과 액운이 든 인물을 동일시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제웅에 액운이 든 인물의 옷을 입히고 사주를 넣어 둠으로써 해당 인물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형태제웅은 짚을 재료로 만든 높이 20~30㎝ 크기의 [인형](/topic/인형)이다. 크기나 모양은 만든 사람에 따라 일정치 않지만 사람의 형상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제웅의 모양이 만든 사람에 따라 다르듯 제웅에 부착하는 사물도 조금씩 다르다.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짚으로 만든 제웅 안에 동전을 넣는 것이다. 조선시대 여러 세시기에서는 엽전 몇 닢을 제웅의 머리 또는 배 부위에 넣는다고 적고 있다.

동전을 넣는 것 외에 장식이 따르는 예도 있다. 『세시기』에 따르면 제웅에 ‘옷을 입힌다.’고 한다. 누구의 옷을 입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액운이 든 인물의 옷을 입혔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제웅을 통한 액막이에서도 나타난다. 오늘날에도 특정인이 나후직성의 액운이 든 경우 해당 인물의 [속옷](/topic/속옷)을 제웅에 입히는 일이 다수 발견된다.

이 밖에 나후직성에 든 인물의 사주를 제웅에 부착하는 예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제웅과 액운이 든 인물을 동일시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제웅에 액운이 든 인물의 옷을 입히고 사주를 넣어 둠으로써 해당 인물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지역사례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에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저녁에 제웅을 불태웠다. 정월대보름 이전에 가족의 신수를 보아서 그해에 운이 나쁜 사람을 대상으로 제웅을 만든다. 제웅은 사람 모양의 짚으로 만든 [인형](/topic/인형)이다. 제웅 속에는 운이 나쁜 사람의 나이만큼 십 원짜리 동전을 넣는다.

다 만든 제웅을 [가지](/topic/가지)고 대보름날 저녁에 삼거리 길에 나간다. [북어](/topic/북어)나 떡, 과일 등 준비한 제물을 길가에 놓고 그 옆에 제웅을 놓은 뒤 [비손](/topic/비손)을 한다. 빌기를 마치면 제웅을 불태웠다. 이렇게 제웅을 태우는 것을 ‘액맥이 태운다.’고 하였다.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도 정월대보름 저녁에 제웅을 만들었다. 이 [마을](/topic/마을)에서는 이것을 ‘지웅’이라고 하였다. 지웅 안에는 돈을 넣었다. 이 지웅은 그해 운수가 나쁜 가족의 액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해당 가정의 주부가 주로 이 액막이를 하며, 지웅을 ‘액땜한다.’고 하면서 물에다 빠뜨린다.

충남 금산군 [진산](/topic/진산)면 만악리 초미동마을에서는 정초에 신수를 보고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정월 열나흗날에 [거리제](/topic/거리제)를 지내준다. 거리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밤에 지낸다. 제물로는 잡곡밥이나 쌀밥 세 그릇, 나물 세 가지를 준비한다. 이 밖에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도 준비하여 네거리로 나간다. 네거리에 짚을 열십자로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고사](/topic/고사)를 지내고나면 제물을 사방에 던진다. 허수아비는 막대기에 짚을 엮어 사람 형태를 만든 것이다. 안에는 신수가 좋지 않은 사람의 나이 수대로 동전을 넣어둔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옷[[속옷](/topic/속옷)]을 입혀서 길거리에 세워두거나 고사가 끝나면 태워 없앤다. 거리제를 지낸 음식은 먹으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고사가 끝나면 사람들이 집어먹었다.

보령시 웅천읍 노천리 가라티마을에서는 그해에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거리제를 지낸다. [안택](/topic/안택)하는 날에 지내기도 하고 정월 열나흗날에 따로 지내기도 한다. 정월 열나흗날은 모든 액운이 없어진다고 하여 재액을 풀어내는 날로 여기고 있다. 거리제를 지낼 때 가족 가운데 살이 낀 사람을 위해 무당을 불러 살풀이를 하기도 하고, 운수가 나쁜 사람을 위해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액땜을 하기도 한다.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인형은 불태운다.

연기군 금남면 금천1리 원금천마을에서는 가족의 신수를 보고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정월 열나흗날에 거리제를 지낸다. 주부 홀로 하기도 하고 무당을 불러 하기도 한다. 무당을 부르면 자연스레 큰 정성이 된다.

제물로 떡, 삼색실과, 술 등을 준비한다. [시루떡](/topic/시루떡)은 3켜나 5켜로 하되 짝수 켜로 하지 않는다. 날이 어두워지면 세거리나 네거리 길로 나가서 짚을 열십자로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이때 동전도 올린다. 술 한 잔을 붓고 동서남북으로 돌면서 절을 한다. 이때 절은 세 번 이상 한다. 죽을 운이 든 사람을 위해서는 허수깨비(허수아비)를 만들어서 가지고 간다. [대수대명](/topic/대수대명)(代數代命)을 해 주기 위하여 허수깨비에게 그 사람의 속옷을 입히고 짚으로 일곱 매듭을 묶어서 불사른다.

치성을 마치면 제물을 사방에 던지고 짚 위에 떡을 듬뿍 떼어 놓은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다. 제사 지낸 음식을 먹으면 좋다고 하여 아이들이 기다렸다가 서로 주워 먹는다.
참고문헌한국의 풍속-상 (문화재관리국, 1970)
한국민속놀이의 연구 (최상수, 성문각, 1985)
한국민속대[사전](/topic/사전) 2 (민족문화사, 1991)
조선대세시기Ⅰ (국립민속박물관, 2003)
한국의 가정신앙-강원도․충남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京都雜志, 東國歲時記, 歲時記, 歲時記俗, 漢陽歲時記, 海東竹枝, 광주시지 (경기도 광주시사편찬위, 2010)
지역사례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에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저녁에 제웅을 불태웠다. 정월대보름 이전에 가족의 신수를 보아서 그해에 운이 나쁜 사람을 대상으로 제웅을 만든다. 제웅은 사람 모양의 짚으로 만든 [인형](/topic/인형)이다. 제웅 속에는 운이 나쁜 사람의 나이만큼 십 원짜리 동전을 넣는다.

다 만든 제웅을 [가지](/topic/가지)고 대보름날 저녁에 삼거리 길에 나간다. [북어](/topic/북어)나 떡, 과일 등 준비한 제물을 길가에 놓고 그 옆에 제웅을 놓은 뒤 [비손](/topic/비손)을 한다. 빌기를 마치면 제웅을 불태웠다. 이렇게 제웅을 태우는 것을 ‘액맥이 태운다.’고 하였다.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도 정월대보름 저녁에 제웅을 만들었다. 이 [마을](/topic/마을)에서는 이것을 ‘지웅’이라고 하였다. 지웅 안에는 돈을 넣었다. 이 지웅은 그해 운수가 나쁜 가족의 액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해당 가정의 주부가 주로 이 액막이를 하며, 지웅을 ‘액땜한다.’고 하면서 물에다 빠뜨린다.

충남 금산군 [진산](/topic/진산)면 만악리 초미동마을에서는 정초에 신수를 보고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정월 열나흗날에 [거리제](/topic/거리제)를 지내준다. 거리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밤에 지낸다. 제물로는 잡곡밥이나 쌀밥 세 그릇, 나물 세 가지를 준비한다. 이 밖에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도 준비하여 네거리로 나간다. 네거리에 짚을 열십자로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고사](/topic/고사)를 지내고나면 제물을 사방에 던진다. 허수아비는 막대기에 짚을 엮어 사람 형태를 만든 것이다. 안에는 신수가 좋지 않은 사람의 나이 수대로 동전을 넣어둔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옷[[속옷](/topic/속옷)]을 입혀서 길거리에 세워두거나 고사가 끝나면 태워 없앤다. 거리제를 지낸 음식은 먹으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고사가 끝나면 사람들이 집어먹었다.

보령시 웅천읍 노천리 가라티마을에서는 그해에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거리제를 지낸다. [안택](/topic/안택)하는 날에 지내기도 하고 정월 열나흗날에 따로 지내기도 한다. 정월 열나흗날은 모든 액운이 없어진다고 하여 재액을 풀어내는 날로 여기고 있다. 거리제를 지낼 때 가족 가운데 살이 낀 사람을 위해 무당을 불러 살풀이를 하기도 하고, 운수가 나쁜 사람을 위해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액땜을 하기도 한다.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인형은 불태운다.

연기군 금남면 금천1리 원금천마을에서는 가족의 신수를 보고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정월 열나흗날에 거리제를 지낸다. 주부 홀로 하기도 하고 무당을 불러 하기도 한다. 무당을 부르면 자연스레 큰 정성이 된다.

제물로 떡, 삼색실과, 술 등을 준비한다. [시루떡](/topic/시루떡)은 3켜나 5켜로 하되 짝수 켜로 하지 않는다. 날이 어두워지면 세거리나 네거리 길로 나가서 짚을 열십자로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이때 동전도 올린다. 술 한 잔을 붓고 동서남북으로 돌면서 절을 한다. 이때 절은 세 번 이상 한다. 죽을 운이 든 사람을 위해서는 허수깨비(허수아비)를 만들어서 가지고 간다. [대수대명](/topic/대수대명)(代數代命)을 해 주기 위하여 허수깨비에게 그 사람의 속옷을 입히고 짚으로 일곱 매듭을 묶어서 불사른다.

치성을 마치면 제물을 사방에 던지고 짚 위에 떡을 듬뿍 떼어 놓은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다. 제사 지낸 음식을 먹으면 좋다고 하여 아이들이 기다렸다가 서로 주워 먹는다.
참고문헌한국의 풍속-상 (문화재관리국, 1970)
한국민속놀이의 연구 (최상수, 성문각, 1985)
한국민속대[사전](/topic/사전) 2 (민족문화사, 1991)
조선대세시기Ⅰ (국립민속박물관, 2003)
한국의 가정신앙-강원도․충남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京都雜志, 東國歲時記, 歲時記, 歲時記俗, 漢陽歲時記, 海東竹枝, 광주시지 (경기도 광주시사편찬위, 2010)
집문당황해도 굿의 음악인류학이용식2005
서울대학교 출판부한국음악의 뿌리, 팔도 굿음악이용식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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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버려진 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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