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읍내리성황제문서

한국무속신앙사전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순흥부 읍치 성황사의 이건과 중수를 하게 된 사연과 경과 및 조선왕조의 종식과 함께 민간주도형으로 주재집단이 변화한 이후에 제당을 중수한 내용, 그리고 광복 이후 성황제와 성황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역민들이 기금을 모금한 내용과 기금의 증식과정 및 찬조와 관련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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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순흥부 읍치 성황사의 이건과 중수를 하게 된 사연과 경과 및 조선왕조의 종식과 함께 민간주도형으로 주재집단이 변화한 이후에 제당을 중수한 내용, 그리고 광복 이후 성황제와 성황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역민들이 기금을 모금한 내용과 기금의 증식과정 및 찬조와 관련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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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순흥부 읍치 성황사의 이건과 중수를 하게 된 사연과 경과 및 조선왕조의 종식과 함께 민간주도형으로 주재집단이 변화한 이후에 제당을 중수한 내용, 그리고 광복 이후 성황제와 성황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역민들이 기금을 모금한 내용과 기금의 증식과정 및 찬조와 관련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정의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순흥부 읍치 성황사의 이건과 중수를 하게 된 사연과 경과 및 조선왕조의 종식과 함께 민간주도형으로 주재집단이 변화한 이후에 제당을 중수한 내용, 그리고 광복 이후 성황제와 성황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역민들이 기금을 모금한 내용과 기금의 증식과정 및 찬조와 관련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참조영주읍내리성황제
참조영주읍내리성황제
내용영주읍내리성황제 관련 문서는 「성황사이건기(城隍祠移建記)」, 「성황사중수기(城隍祠 重修記)」, 『모연문(募緣文)』, ‘순흥소농조합 규약’, 『임원록(任員錄)』. 『두여고사기(斗餘告祀記)』, 『소임급찬조방명록(所任及贊助芳名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황사이건기는 나무 [현판](/topic/현판)으로 조선 후기인 1754년 4월에 성황사를 이건하던 상황에서 그 과정을 소개한 글이다. 이건기에는 제당을 이건한 이유와 과정, 의미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성황사이건기(城隍祠移建記)
생각컨대 부(府)의 경계를 보호하고 편하게 하는 것은 성황(城隍)만 같은 것이 없고 관방(關坊)을 거느리고 이끄는 것도 성황(城隍)만 같은 것이 없다.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막론하고 이 성황을 의논(議論)했다. 이것으로 비를 막고 바람을 막으며 초하루마다 경건히 예를 드리면 복을 받음이 몹시 클 것이다. 백성들이 해를 입지 않고 또 각각 신을 모시고 치제(致祭)한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이유를 고해야 할 것이며, 부 경계의 봉내(封內)를 영솔(領率)하여 주장하기 때문에 성(城)이라 하고 황(隍)이라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니라. 지금 치소 내의 [진산](/topic/진산)(鎭山)에 성황사(城隍祠)가 오래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기와](/topic/기와)가 깨어지고 벽이 허물어 썩어 기울어져 무너지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제대로 되지 못했다. 만약 이런 성황이라면 재앙을 없애고 우환을 막을 수 있겠는가. 맹수가 사람을 핍박하고 악독한 여귀가 끊이지 않아서 신도 꾸짖어 금하지 않으니 이것이 일부 사람들이 답답한 심정으로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전 금년 정월 모일에 부사(府使) 조공(趙公)이 부인(府人) 김창회(金昌會) 김치윤(金致胤)에게 명하여 깨끗한 곳에 이건하고 화려하게 집을 지었다. 무릇 이건 사업을 경영하니 전에 비해 크고 세밀하며 기일을 정하여 처리해서 일찍이 작업을 하여 시기를 넘지 않고 역사(役事)가 이미 완료되었다. 기도하면서 신상(神像)을 받들어서 제사를 드리니 나무로 만든 소상(塑像)이 의젓하게 앉아 마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듯했다. [봉안](/topic/봉안)(奉安)하는 날에 명랑한 기운이 퍼져 나가니 훈훈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이에 알겠다. 신이 다가옴을 헤아릴 수 없지만 싫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의미를 여기에서 알겠노라. 마침내 이어서 찬송(讚頌)의 시(詩)를 바친다.

소백(小白)의 양지 바른 남쪽 순흥 고을 산허리에
우뚝 솟은 [사당](/topic/사당)은 먼지가 이끼에 깊이 잠겼다.
신이 노하여서 재앙을 일으킨다.
사람은 죽음과 병에 걸리고 짐승은 멋대로 날뛴다.
관을 방어하는 데 이로움과 해로움이 모두 성황에 달렸다.
이 때문에 두려워서 다시 도모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깨끗한 곳에 터를 잡고 지어서 이미 소상을 받들어 모셨다.
사당 모습을 새로이 바꾸니 희생과 술이 향기롭다.
신께서 도우셔서 우리 순흥 경내를 은혜롭게 하소서
요망한 재앙을 구제하여 백성의 생명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상서로운 경사가 크게 베풀어짐에 온갖 행복이 몰려온다.
송(頌)을 써서 새겨 걸었으니 어찌 천년 만년에 그칠 것인가.
건륭(乾隆) 19년 갑술(甲戌) 4월(四月) 일(日)

성황사중수기는 나무 현판으로 조선 후기인 1766년 여름에 성황사를 중수한 이유와 과정,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하여 성황사가 국가 권력과 지역 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적 중심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지역 주민 통치에 성황사가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황사중수기(城隍祠重修記)
고을의 성황신(城隍神)이 있으니 그를 위해 사(祠)를 지어서 봉안했다. 신(神)은 한 고을을 주관하니 한 고을의 책임을 맡은 자는 이 사당(祠堂)을 경시하지 못하고 중시 여기는 것이다. 고을의 원이 관리하는 바로서 고을이 다시 설치된 이후로 사당이 있어 왔다. 고을의 원이 늘 수리하고 개수(改修)해서 그것을 살피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니 총사(叢祠)나 음사(淫祠)에 비하지 않았다. 깨끗한 곳에 터를 잡고 길한 날에 사당(祠堂)을 세워서 고을의 모든 재앙(災殃) 괴변(怪變)을 기도(祈禱)해서 없애지 않음이 없었다. 간혹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어 어려울 때 또한 기원을 빌면 신도 또한 꾸짖고 나무라서 좋은 데로 돌린다. 요구함이 있으면 곧 그것에 응함이 있으니 신이야 말로 참으로 기이하도다. 지난 갑술년(甲戌年)에 고을 원(元) 조공(趙公)이 비로소 이 동네에 옮겼는데 당의 규모가 몹시 완벽하고 치밀했다. 그 이후 해마다 풍우가 괴롭혀서 [기둥](/topic/기둥)이 무너[지게](/topic/지게) 되니 그 형세가 하루 저녁도 지탱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우리 정후(鄭候, 고을 원님)가 특별히 백성의 민의(民意)를 위해서 중수(重修)하도록 지시했다. 먼저 역사(役事)에 필요한 양식을 조달하고 재목(材木)을 공급하고 일꾼을 허락했다. 또 명하여 성황사(城隍祠)는 고을 백성들에게 몹시 중요한 점이 있다면 이 사당을 업신여길 수 있겠으며 이 역사를 늦출 수 있겠느냐고 했다. 알리는 것이 믿음으로써 했기에 일하는 사람 또한 그 일을 즐거이 하니 한 달이 걸리지 않아 공사가 끝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우리 현명한 고을 원님의 힘이었다. 고을 아전이 신상(神像)을 봉안(奉安)하는 날 저녁에 목욕재계하고 백배(百拜)하면서 신에게 축원(祝願)하기를 우리 현명한 고을 원님이 백성을 위해서 신사(神祠)를 수리(修理)했나이다. 원컨대 신께서는 명부(明府)의 뜻을 체득하여 우리 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리소서. 해마다 곡식은 풍년들었던 가까운 시기와 비유해서 크게 하시고 만일 전염병이 들면 산 왼쪽편으로 몰아주시고 재변(災變)이 일어나면 물리쳐 주소서. 비를 바라면 거기서 맞춰 내려주시고 우리 고을 경내로 하여금 유독 태평성대를 만들어 주신다면 신의 덕이 장차 끝이 없을 것이고 우리 원님의 은혜도 더불어 빛날 것이라고 축원했다. 축원을 끝내고 서로 거느리고 나오니 날씨는 개어서 따뜻하고 은혜로운 바람이 때맞추어 불어오니 신도 또한 들어주시는 것 같다. 이상으로 기문(記文)을 대신하노라.
건륭(乾隆) 31년 병술(丙戌) [맹하](/topic/맹하)(孟夏) 기망기(旣望記)

『모연문(募緣文)』은 주재집단이 관(官)에서 지역민에게로 이관된 이후인 병오년(1906)에 지역민들이 제당을 중수하기 위해서 읍내리를 포함한 주변지역의 많은 [마을](/topic/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경비를 모금하였던 기록이다. 모연문은 [한지](/topic/한지)를 묶어서 1권으로 만들어졌다. 『모연문』의 제일 앞장에는 모금을 하게 된 사연이 기록되어 있고, 그다음 장부터는 모금에 참여한 사람의 성명 또는 관직 또는 [택호](/topic/택호)와 금액을 기록했다. 성명의 기록란에는 빨강이나 파랑, 초록 등의 색지가 덧붙여져 있는 경우도 많지만 그 의미는 파악되지 않았다. 여기에 기록된 기부자들의 거주지를 살펴보면 당시에 성황당이 이 지역주민들의 상징적 중심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모연문(募緣文)
대저 살펴보면 빗물에 목욕하고 바람에 머리 빗으며, 바야흐로 영신(靈神)의 완전(宛轉, 천천히 춤추는 모양)을 우러러보니, 무겁기는 산과 같고 깊기는 바다와 같은데, 다행히 중생의 모연지덕(募緣之德)이 성함을 보고 정성이 지극함을 느끼노라. 엎드려 바라옵건대 두곡 성황이시여, 몇년이나 계시면서 영비(靈秘)함이 찬연히 보였습니까. 법식(法式)은 지금까지 이르지만 굿하고 보답함은 여러 모양입니다. 말은 성지합황의 크고 넉넉함에 대한 은혜를 생각하고, 굿은 야유와 도깨비들을 을러서 이것을 꾸짖어 못하게 하는데, 기도하면 응함이 있음을 비웃는 촌민의 [어리](/topic/어리)석음에 신령님은 속에서 가식으로 받듦을 엿보고 기다리며 그것을 듣는구나. 이에 두여(斗如)의 옛터를 돌아보니 홀로 우뚝 서 있는 것이 [본사](/topic/본사)(本祠)구나. 소백의 깊고 깊은 언덕은 울창한 숲이 둘러싸 있는데, 상단곡(上丹谷)의 빽빽이 들어찬 그늘에 걸터앉으니, 나뭇[가지](/topic/가지)는 움직이는 별을 가로막고 과객의 어리석음을 살피는구나. 한데서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다만 초부의 한 가지 정성으로 기도드리니, 급벌 천년의 터를 보호하는 숲뒤 한 모퉁이 터가 있구나. 이 마을의 소가 지레 겁을 내는 것은 차라리 이 산신의 영(靈)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에 여러 번을 폐하고 속(俗)되어도 다시 일어서는 때에 이르러, 이미 여러 사람이 도모해서 상의하는 모임을 가졌더니, 상원지가절(上元之佳節)에 산골짜기 물의 영에게 깊이 제사 올리고, 또한 존령의 강림을 받드니 동북풍의 바람이 사방에 조용하네. 기뻐하면서 북을 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춤을 추니, 두루 충만하게 신이 내리시고 고요하게 신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배우들의 잡진(雜陳)으로 시작하여 무격의 어지럽고 떠들석함이 즐겁고, 동풍이 만신령(萬神靈)을 나부끼니 우운(雨雲)이 무지개같이 아름답구나. 풍악소리는 만죽지(萬竹枝)를 족히 움직이고 노랫소리는 별똥처럼 빠르고 번개처럼 흐르는 구나. 모든 집에는 명월이 완연하여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고, 일지춘매(一枝春梅)는 그 선물이 가는 것을 바라보며 즐기는구나. 그러나 또한 베풀어진 춤이 다 끝났는데도 망설여지지만 어찌 그 빈터에 천천히 할 수 있는가. 모든 백성들과 군자들이시여. 무릇 불문(佛門)에 불공드리는 자리마다 종이가 겹겹이 쌓였고, 또한 [시주](/topic/시주) 장소에 집을 지어서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도우니, 과연 이 모든 것에 가히 칭찬할 만하지 않은가. 한 톨의 쌀과 한 오라기의 실이 모이면 태산처럼 크지 않겠는가. 돈으로서 곡식으로서 이에 이 공든 탑이 무너지겠는가.

‘순흥소농조합 규약’은 한지 2장이며 이 자료는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면소재지에 설립되었던 소농조합이 지역사회의 [농민](/topic/농민)조직을 이용하여 농촌사회를 재정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이 지역 성황사의 주제집단의 우두머리인 [좌상](/topic/좌상)이 노동조직의 작은 우두머리가 되는 등 주제집단이 소농조합의 일원으로 전락하면서 성황제가 매우 위축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즉 일제강점기에 농촌지역의 동제(성황제)가 처한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임원록』은 순흥면 읍내리 노무자 모임(順興面 邑內里 勞務者會中)에서 1945년(丙戌七月初七日)에 시작하여 1992년까지 작성하였다. 1993년부터는 공책(notebook)에 기록하였다. ‘노무자회’는 일제강점기에 변경해서 사용했던 초군청의 명칭이다. 여기에는 초군청 임원의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1945년부터 지금까지 좌상과 총무가 각 1명이며, 간사의 숫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좌상은 초군청의 대표이며, 총무는 좌상을 도와서 전체의 일을 총괄하고, 간사는 초군청의 실무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1951년부터는 집사가 등장하고, 1963년부터는 고문의 직책이 등장하는 등 초군청 조직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분화되고 더욱 조직화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광복 이후에 초군청이 성황제 주재집단으로의 기반을 스스로 다지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1945년부터는 좌상과 총무 각 1인과 간사 4인이지만, 1951년부터는 공문집사(公文執事) 1인과 간사 9인, 1956년부터는 집사 1인, 간사 14명, 1960년부터는 간사 12명, 1963년부터는 고문 3명이 추가되면서 간사 17명, 1964년에는 고문 3명과 간사 30명, 1965년에는 고문 4명과 간사 21명이, 1967년에는 고문 6명과 간사 18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전의 것은 주민들이 소각하여 찾을 수 없다.

『두여고사기』는 두여동고사수전기(斗餘洞告祀收錢記)이다. 1948년도에 두렛골 성황제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순흥면 일대의 모든 마을로부터 모금한 상황과 그 자금을 주민들에게 빌려 주면서 이식을 받아서 자금을 늘려 나가는 1993년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지역민 집단인 초군청은 1948년도에 성황제를 주관하는 읍내리 1ㆍ2구를 비롯하여 읍내 3구(사현정), 내죽 1구(속수동), 청구 1ㆍ2ㆍ3구, 내죽 2ㆍ3구(송림), 태장 1ㆍ2(묵동)ㆍ3구, 석교 1ㆍ2(당촌)ㆍ3구, 지동 1ㆍ2구, 순흥시장 사람들, 덕현, 배점 1ㆍ2구, 고두암 등 순흥 지역민 전체가 동참하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펼쳐서 현금 4만 9,970원, 백미 235되, 율미 8합, 소두 1되를 모금하였다. 초군청에서는 이 기금을 주민들에게 빌려주어서 이자와 함께 이듬해에 받아들이는[收錢] 방법으로 기금을 증식하였다. 그 조건은 ‘모든 차용자는 보증인을 두어야 하며, 이자는 100원당 매월 5원씩이며, 반제일(返濟日)은 음력 11월 24일’이다. 이자는 시기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지만 매우 저렴한 편이다. 이러한 노력은 초군청 성원들 스스로 지역 정체성의 중심인 성황제를 활성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적극적인 자기[民] 중심적 문화창조 행위의 일환이다. 이 기록은 매년 성황제를 수행할 때 찬조금액과 제물 구입 등 소요경비, 초군청 재산 등의 변화, 즉 수입과 지출, 잔고 등을 기록한 양성황당수지부(兩城隍堂收支簿)이기도 하다. 이 기금은 초군청이 성황제를 수행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이전의 것은 주민들이 소각하여 찾을 수 없다.

『소임 급 찬조 방명록』은 상당 성황당과 하당 성황당의 제의를 주관하는 [제관](/topic/제관)의 명칭과 그 해의 찬조자 명단과 찬조 금액을 기록한 것으로, 무신년(1968)부터 1992년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의 찬조자 숫자와 찬조금액의 변화를 통해서 성황제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즉 1982년부터 제당을 이용하는 보살들의 찬조와 외지인들의 찬조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1990년부터는 순흥면장의 찬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성황제가 마을 주민들 중심으로만 행해지다가 외부인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경제적인 기반이 확립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자료는 지역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民] 중심적 노력을 살필 수 있도록 한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초군청에는 아주 오래된 문서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서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기에 주민들이 오래된 문서들을 직접 소각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곳에 소개한 임원록(任員錄)과 두여고사기(斗餘告祀記), 소임급찬조방명록(所任及贊助芳名錄) 등은 조사 당시인 1993년도에 남아 있던 것들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2003년도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이 문서들마저도 보관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일부 소각하였다고 한다.
내용영주읍내리성황제 관련 문서는 「성황사이건기(城隍祠移建記)」, 「성황사중수기(城隍祠 重修記)」, 『모연문(募緣文)』, ‘순흥소농조합 규약’, 『임원록(任員錄)』. 『두여고사기(斗餘告祀記)』, 『소임급찬조방명록(所任及贊助芳名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황사이건기는 나무 [현판](/topic/현판)으로 조선 후기인 1754년 4월에 성황사를 이건하던 상황에서 그 과정을 소개한 글이다. 이건기에는 제당을 이건한 이유와 과정, 의미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성황사이건기(城隍祠移建記)
생각컨대 부(府)의 경계를 보호하고 편하게 하는 것은 성황(城隍)만 같은 것이 없고 관방(關坊)을 거느리고 이끄는 것도 성황(城隍)만 같은 것이 없다.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막론하고 이 성황을 의논(議論)했다. 이것으로 비를 막고 바람을 막으며 초하루마다 경건히 예를 드리면 복을 받음이 몹시 클 것이다. 백성들이 해를 입지 않고 또 각각 신을 모시고 치제(致祭)한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이유를 고해야 할 것이며, 부 경계의 봉내(封內)를 영솔(領率)하여 주장하기 때문에 성(城)이라 하고 황(隍)이라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니라. 지금 치소 내의 [진산](/topic/진산)(鎭山)에 성황사(城隍祠)가 오래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기와](/topic/기와)가 깨어지고 벽이 허물어 썩어 기울어져 무너지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제대로 되지 못했다. 만약 이런 성황이라면 재앙을 없애고 우환을 막을 수 있겠는가. 맹수가 사람을 핍박하고 악독한 여귀가 끊이지 않아서 신도 꾸짖어 금하지 않으니 이것이 일부 사람들이 답답한 심정으로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전 금년 정월 모일에 부사(府使) 조공(趙公)이 부인(府人) 김창회(金昌會) 김치윤(金致胤)에게 명하여 깨끗한 곳에 이건하고 화려하게 집을 지었다. 무릇 이건 사업을 경영하니 전에 비해 크고 세밀하며 기일을 정하여 처리해서 일찍이 작업을 하여 시기를 넘지 않고 역사(役事)가 이미 완료되었다. 기도하면서 신상(神像)을 받들어서 제사를 드리니 나무로 만든 소상(塑像)이 의젓하게 앉아 마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듯했다. [봉안](/topic/봉안)(奉安)하는 날에 명랑한 기운이 퍼져 나가니 훈훈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이에 알겠다. 신이 다가옴을 헤아릴 수 없지만 싫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의미를 여기에서 알겠노라. 마침내 이어서 찬송(讚頌)의 시(詩)를 바친다.

소백(小白)의 양지 바른 남쪽 순흥 고을 산허리에
우뚝 솟은 [사당](/topic/사당)은 먼지가 이끼에 깊이 잠겼다.
신이 노하여서 재앙을 일으킨다.
사람은 죽음과 병에 걸리고 짐승은 멋대로 날뛴다.
관을 방어하는 데 이로움과 해로움이 모두 성황에 달렸다.
이 때문에 두려워서 다시 도모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깨끗한 곳에 터를 잡고 지어서 이미 소상을 받들어 모셨다.
사당 모습을 새로이 바꾸니 희생과 술이 향기롭다.
신께서 도우셔서 우리 순흥 경내를 은혜롭게 하소서
요망한 재앙을 구제하여 백성의 생명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상서로운 경사가 크게 베풀어짐에 온갖 행복이 몰려온다.
송(頌)을 써서 새겨 걸었으니 어찌 천년 만년에 그칠 것인가.
건륭(乾隆) 19년 갑술(甲戌) 4월(四月) 일(日)

성황사중수기는 나무 현판으로 조선 후기인 1766년 여름에 성황사를 중수한 이유와 과정,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하여 성황사가 국가 권력과 지역 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적 중심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지역 주민 통치에 성황사가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황사중수기(城隍祠重修記)
고을의 성황신(城隍神)이 있으니 그를 위해 사(祠)를 지어서 봉안했다. 신(神)은 한 고을을 주관하니 한 고을의 책임을 맡은 자는 이 사당(祠堂)을 경시하지 못하고 중시 여기는 것이다. 고을의 원이 관리하는 바로서 고을이 다시 설치된 이후로 사당이 있어 왔다. 고을의 원이 늘 수리하고 개수(改修)해서 그것을 살피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니 총사(叢祠)나 음사(淫祠)에 비하지 않았다. 깨끗한 곳에 터를 잡고 길한 날에 사당(祠堂)을 세워서 고을의 모든 재앙(災殃) 괴변(怪變)을 기도(祈禱)해서 없애지 않음이 없었다. 간혹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어 어려울 때 또한 기원을 빌면 신도 또한 꾸짖고 나무라서 좋은 데로 돌린다. 요구함이 있으면 곧 그것에 응함이 있으니 신이야 말로 참으로 기이하도다. 지난 갑술년(甲戌年)에 고을 원(元) 조공(趙公)이 비로소 이 동네에 옮겼는데 당의 규모가 몹시 완벽하고 치밀했다. 그 이후 해마다 풍우가 괴롭혀서 [기둥](/topic/기둥)이 무너[지게](/topic/지게) 되니 그 형세가 하루 저녁도 지탱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우리 정후(鄭候, 고을 원님)가 특별히 백성의 민의(民意)를 위해서 중수(重修)하도록 지시했다. 먼저 역사(役事)에 필요한 양식을 조달하고 재목(材木)을 공급하고 일꾼을 허락했다. 또 명하여 성황사(城隍祠)는 고을 백성들에게 몹시 중요한 점이 있다면 이 사당을 업신여길 수 있겠으며 이 역사를 늦출 수 있겠느냐고 했다. 알리는 것이 믿음으로써 했기에 일하는 사람 또한 그 일을 즐거이 하니 한 달이 걸리지 않아 공사가 끝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우리 현명한 고을 원님의 힘이었다. 고을 아전이 신상(神像)을 봉안(奉安)하는 날 저녁에 목욕재계하고 백배(百拜)하면서 신에게 축원(祝願)하기를 우리 현명한 고을 원님이 백성을 위해서 신사(神祠)를 수리(修理)했나이다. 원컨대 신께서는 명부(明府)의 뜻을 체득하여 우리 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리소서. 해마다 곡식은 풍년들었던 가까운 시기와 비유해서 크게 하시고 만일 전염병이 들면 산 왼쪽편으로 몰아주시고 재변(災變)이 일어나면 물리쳐 주소서. 비를 바라면 거기서 맞춰 내려주시고 우리 고을 경내로 하여금 유독 태평성대를 만들어 주신다면 신의 덕이 장차 끝이 없을 것이고 우리 원님의 은혜도 더불어 빛날 것이라고 축원했다. 축원을 끝내고 서로 거느리고 나오니 날씨는 개어서 따뜻하고 은혜로운 바람이 때맞추어 불어오니 신도 또한 들어주시는 것 같다. 이상으로 기문(記文)을 대신하노라.
건륭(乾隆) 31년 병술(丙戌) [맹하](/topic/맹하)(孟夏) 기망기(旣望記)

『모연문(募緣文)』은 주재집단이 관(官)에서 지역민에게로 이관된 이후인 병오년(1906)에 지역민들이 제당을 중수하기 위해서 읍내리를 포함한 주변지역의 많은 [마을](/topic/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경비를 모금하였던 기록이다. 모연문은 [한지](/topic/한지)를 묶어서 1권으로 만들어졌다. 『모연문』의 제일 앞장에는 모금을 하게 된 사연이 기록되어 있고, 그다음 장부터는 모금에 참여한 사람의 성명 또는 관직 또는 [택호](/topic/택호)와 금액을 기록했다. 성명의 기록란에는 빨강이나 파랑, 초록 등의 색지가 덧붙여져 있는 경우도 많지만 그 의미는 파악되지 않았다. 여기에 기록된 기부자들의 거주지를 살펴보면 당시에 성황당이 이 지역주민들의 상징적 중심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모연문(募緣文)
대저 살펴보면 빗물에 목욕하고 바람에 머리 빗으며, 바야흐로 영신(靈神)의 완전(宛轉, 천천히 춤추는 모양)을 우러러보니, 무겁기는 산과 같고 깊기는 바다와 같은데, 다행히 중생의 모연지덕(募緣之德)이 성함을 보고 정성이 지극함을 느끼노라. 엎드려 바라옵건대 두곡 성황이시여, 몇년이나 계시면서 영비(靈秘)함이 찬연히 보였습니까. 법식(法式)은 지금까지 이르지만 굿하고 보답함은 여러 모양입니다. 말은 성지합황의 크고 넉넉함에 대한 은혜를 생각하고, 굿은 야유와 도깨비들을 을러서 이것을 꾸짖어 못하게 하는데, 기도하면 응함이 있음을 비웃는 촌민의 [어리](/topic/어리)석음에 신령님은 속에서 가식으로 받듦을 엿보고 기다리며 그것을 듣는구나. 이에 두여(斗如)의 옛터를 돌아보니 홀로 우뚝 서 있는 것이 [본사](/topic/본사)(本祠)구나. 소백의 깊고 깊은 언덕은 울창한 숲이 둘러싸 있는데, 상단곡(上丹谷)의 빽빽이 들어찬 그늘에 걸터앉으니, 나뭇[가지](/topic/가지)는 움직이는 별을 가로막고 과객의 어리석음을 살피는구나. 한데서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다만 초부의 한 가지 정성으로 기도드리니, 급벌 천년의 터를 보호하는 숲뒤 한 모퉁이 터가 있구나. 이 마을의 소가 지레 겁을 내는 것은 차라리 이 산신의 영(靈)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에 여러 번을 폐하고 속(俗)되어도 다시 일어서는 때에 이르러, 이미 여러 사람이 도모해서 상의하는 모임을 가졌더니, 상원지가절(上元之佳節)에 산골짜기 물의 영에게 깊이 제사 올리고, 또한 존령의 강림을 받드니 동북풍의 바람이 사방에 조용하네. 기뻐하면서 북을 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춤을 추니, 두루 충만하게 신이 내리시고 고요하게 신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배우들의 잡진(雜陳)으로 시작하여 무격의 어지럽고 떠들석함이 즐겁고, 동풍이 만신령(萬神靈)을 나부끼니 우운(雨雲)이 무지개같이 아름답구나. 풍악소리는 만죽지(萬竹枝)를 족히 움직이고 노랫소리는 별똥처럼 빠르고 번개처럼 흐르는 구나. 모든 집에는 명월이 완연하여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고, 일지춘매(一枝春梅)는 그 선물이 가는 것을 바라보며 즐기는구나. 그러나 또한 베풀어진 춤이 다 끝났는데도 망설여지지만 어찌 그 빈터에 천천히 할 수 있는가. 모든 백성들과 군자들이시여. 무릇 불문(佛門)에 불공드리는 자리마다 종이가 겹겹이 쌓였고, 또한 [시주](/topic/시주) 장소에 집을 지어서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도우니, 과연 이 모든 것에 가히 칭찬할 만하지 않은가. 한 톨의 쌀과 한 오라기의 실이 모이면 태산처럼 크지 않겠는가. 돈으로서 곡식으로서 이에 이 공든 탑이 무너지겠는가.

‘순흥소농조합 규약’은 한지 2장이며 이 자료는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면소재지에 설립되었던 소농조합이 지역사회의 [농민](/topic/농민)조직을 이용하여 농촌사회를 재정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이 지역 성황사의 주제집단의 우두머리인 [좌상](/topic/좌상)이 노동조직의 작은 우두머리가 되는 등 주제집단이 소농조합의 일원으로 전락하면서 성황제가 매우 위축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즉 일제강점기에 농촌지역의 동제(성황제)가 처한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임원록』은 순흥면 읍내리 노무자 모임(順興面 邑內里 勞務者會中)에서 1945년(丙戌七月初七日)에 시작하여 1992년까지 작성하였다. 1993년부터는 공책(notebook)에 기록하였다. ‘노무자회’는 일제강점기에 변경해서 사용했던 초군청의 명칭이다. 여기에는 초군청 임원의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1945년부터 지금까지 좌상과 총무가 각 1명이며, 간사의 숫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좌상은 초군청의 대표이며, 총무는 좌상을 도와서 전체의 일을 총괄하고, 간사는 초군청의 실무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1951년부터는 집사가 등장하고, 1963년부터는 고문의 직책이 등장하는 등 초군청 조직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분화되고 더욱 조직화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광복 이후에 초군청이 성황제 주재집단으로의 기반을 스스로 다지기 위한 노력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1945년부터는 좌상과 총무 각 1인과 간사 4인이지만, 1951년부터는 공문집사(公文執事) 1인과 간사 9인, 1956년부터는 집사 1인, 간사 14명, 1960년부터는 간사 12명, 1963년부터는 고문 3명이 추가되면서 간사 17명, 1964년에는 고문 3명과 간사 30명, 1965년에는 고문 4명과 간사 21명이, 1967년에는 고문 6명과 간사 18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전의 것은 주민들이 소각하여 찾을 수 없다.

『두여고사기』는 두여동고사수전기(斗餘洞告祀收錢記)이다. 1948년도에 두렛골 성황제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순흥면 일대의 모든 마을로부터 모금한 상황과 그 자금을 주민들에게 빌려 주면서 이식을 받아서 자금을 늘려 나가는 1993년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지역민 집단인 초군청은 1948년도에 성황제를 주관하는 읍내리 1ㆍ2구를 비롯하여 읍내 3구(사현정), 내죽 1구(속수동), 청구 1ㆍ2ㆍ3구, 내죽 2ㆍ3구(송림), 태장 1ㆍ2(묵동)ㆍ3구, 석교 1ㆍ2(당촌)ㆍ3구, 지동 1ㆍ2구, 순흥시장 사람들, 덕현, 배점 1ㆍ2구, 고두암 등 순흥 지역민 전체가 동참하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펼쳐서 현금 4만 9,970원, 백미 235되, 율미 8합, 소두 1되를 모금하였다. 초군청에서는 이 기금을 주민들에게 빌려주어서 이자와 함께 이듬해에 받아들이는[收錢] 방법으로 기금을 증식하였다. 그 조건은 ‘모든 차용자는 보증인을 두어야 하며, 이자는 100원당 매월 5원씩이며, 반제일(返濟日)은 음력 11월 24일’이다. 이자는 시기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지만 매우 저렴한 편이다. 이러한 노력은 초군청 성원들 스스로 지역 정체성의 중심인 성황제를 활성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적극적인 자기[民] 중심적 문화창조 행위의 일환이다. 이 기록은 매년 성황제를 수행할 때 찬조금액과 제물 구입 등 소요경비, 초군청 재산 등의 변화, 즉 수입과 지출, 잔고 등을 기록한 양성황당수지부(兩城隍堂收支簿)이기도 하다. 이 기금은 초군청이 성황제를 수행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이전의 것은 주민들이 소각하여 찾을 수 없다.

『소임 급 찬조 방명록』은 상당 성황당과 하당 성황당의 제의를 주관하는 [제관](/topic/제관)의 명칭과 그 해의 찬조자 명단과 찬조 금액을 기록한 것으로, 무신년(1968)부터 1992년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의 찬조자 숫자와 찬조금액의 변화를 통해서 성황제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즉 1982년부터 제당을 이용하는 보살들의 찬조와 외지인들의 찬조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1990년부터는 순흥면장의 찬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성황제가 마을 주민들 중심으로만 행해지다가 외부인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경제적인 기반이 확립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자료는 지역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民] 중심적 노력을 살필 수 있도록 한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초군청에는 아주 오래된 문서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서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기에 주민들이 오래된 문서들을 직접 소각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곳에 소개한 임원록(任員錄)과 두여고사기(斗餘告祀記), 소임급찬조방명록(所任及贊助芳名錄) 등은 조사 당시인 1993년도에 남아 있던 것들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2003년도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이 문서들마저도 보관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일부 소각하였다고 한다.
의의성황사 이건기와 중수기는 조선 후기의 지방 수령들이 읍치 성황사를 통하여 지역사회의 통치질서를 확립, 유지, 강화하였던 일면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성황사의 이건과 중수과정에서 향리와 지역사회 유지들이 참여하면서 지역민 통치에 이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 자료를 통해서 조선 후기의 지역사회에서 대상신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신앙이 지역민의 정체성을 장악함으로써 지역사회 통치전략에 크게 이용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각 지역사회의 성황사가 지니는 중요성은 조선왕조의 종식과 함께 중단된다. 왕조가 종식되면서 각 지역사회의 성황사의 행방에 대해서 그동안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의 지역민 집단인 초군청이 주도하는 성황제를 통하여 그 일면을 살필 수 있었다. 즉 조선 후기에 이 지역에서 조직되었던 ‘초군청’이 조선왕조가 종식되는 시점에서 순흥부에서 행하던 성황제를 이관 받아서 지역민 중심의 성황제로 주재집단이 변화하면서 유지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모연문』은 관 주도의 성황제가 민(民) 주도의 성황제로 주재집단이 변화하면서 겪게 되었던 지역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펼쳤던 모금운동의 내력과 극복 과정을 기록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임원록』ㆍ『두여고사기』ㆍ『소임급찬조방명록』 등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초군청의 열악한 자금사정을 극복하고 성황제를 영속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과정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즉 초군청 임원들의 숫자를 확대하면서 인적 자원을 확보한 내용, 기금의 이식과 관련한 수전(收錢) 상황, 성황제 수행과정에서의 수입과 지출 및 잔고 등을 기록하였으며, 소임과 찬조자들의 명단과 금액 등을 정리하였다. 이들 자료는 [마을](/topic/마을)사회에서 주민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등을 엿볼 수 있으며, 마을사회사의 변동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의의성황사 이건기와 중수기는 조선 후기의 지방 수령들이 읍치 성황사를 통하여 지역사회의 통치질서를 확립, 유지, 강화하였던 일면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성황사의 이건과 중수과정에서 향리와 지역사회 유지들이 참여하면서 지역민 통치에 이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 자료를 통해서 조선 후기의 지역사회에서 대상신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신앙이 지역민의 정체성을 장악함으로써 지역사회 통치전략에 크게 이용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각 지역사회의 성황사가 지니는 중요성은 조선왕조의 종식과 함께 중단된다. 왕조가 종식되면서 각 지역사회의 성황사의 행방에 대해서 그동안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의 지역민 집단인 초군청이 주도하는 성황제를 통하여 그 일면을 살필 수 있었다. 즉 조선 후기에 이 지역에서 조직되었던 ‘초군청’이 조선왕조가 종식되는 시점에서 순흥부에서 행하던 성황제를 이관 받아서 지역민 중심의 성황제로 주재집단이 변화하면서 유지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모연문』은 관 주도의 성황제가 민(民) 주도의 성황제로 주재집단이 변화하면서 겪게 되었던 지역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펼쳤던 모금운동의 내력과 극복 과정을 기록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임원록』ㆍ『두여고사기』ㆍ『소임급찬조방명록』 등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초군청의 열악한 자금사정을 극복하고 성황제를 영속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과정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즉 초군청 임원들의 숫자를 확대하면서 인적 자원을 확보한 내용, 기금의 이식과 관련한 수전(收錢) 상황, 성황제 수행과정에서의 수입과 지출 및 잔고 등을 기록하였으며, 소임과 찬조자들의 명단과 금액 등을 정리하였다. 이들 자료는 [마을](/topic/마을)사회에서 주민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등을 엿볼 수 있으며, 마을사회사의 변동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열화당강릉단오김선풍1987
강릉시강릉단오제황루시1994
강릉문화원강릉단오제 백서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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