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한국무속신앙사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월간지. 여기에 수록된 민속관련 논문들은 가정신앙 등 초기 민속 연구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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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월간지. 여기에 수록된 민속관련 논문들은 가정신앙 등 초기 민속 연구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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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규
정의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월간지. 여기에 수록된 민속관련 논문들은 가정신앙 등 초기 민속 연구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정의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월간지. 여기에 수록된 민속관련 논문들은 가정신앙 등 초기 민속 연구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내용『조선』에는 최남선・안확・이능화 등 저명한 국학자들의 민속 관련 글들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정신앙과 관련된 것은 일본어판 제280호(1938.9)에 실린, 장승두의 「조선 고대사회의 배화사상과 혼인제도의 연원에 관한 고찰」이다. 이 글에서 장승두는 가정신앙으로서 불 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씨불 및 씨불지킴이의 존재로 입증해 보였다. 혼인의례에서의 [횃불싸움](/topic/횃불싸움)을 비롯한 일련의 행위도 신랑집과 신부집 사이에 씨불을 놓고 벌어지는 모의쟁탈전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 한반도 민족이 가장 경이를 느낀 것은 ‘불’의 신비였다. ‘불’은 생물을 익게 하고 모든 오물을 태워서 없애는 정화력이 있으며, 게다가 항상 붉고 신비한 빛을 발하여 밤의 어두움을 몰아낸다. 그래서 고대인은 집집마다 가문 보존을 위한 신성물인 ‘씨불’을 두고 그것을 정성껏 받들었다. 불단지는 [부루단지](/topic/부루단지) 또는 업주가리라고 일컬어져 농촌에서 집집마다 재신(財神)으로 모시고 있다. ‘부루단지’의 연원은 고대의 씨불 지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루단지의 부루는 불이 변한 것으로, ‘불〔火〕’과 같은 의미이며, 부루단지는 씨불을 넣기 위해 설치된 도기(陶器)였다. 고대인은 불의 신이 [오곡](/topic/오곡)을 결실시키고 잘 익게 한다고 믿었다. 집의 재산도 불신〔火神〕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단지에다 [곡물](/topic/곡물)이 잘 열리고 풍년이 지속되고 재산이 늘어 집안이 번창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것이 후대에 이르러 불단지를 단지 재신(財神)으로 모시게 되었고, 불신〔火神〕숭배관념이 약해지면서 씨불 대신 오곡을 넣고 제사를 지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불〔火〕은 생물을 익히고 그것의 수를 불어나게 하기 때문에 불, 부루에 ‘증식(增殖)’의 의미가 생긴 모양이다.

농촌에 가면 집집마다 반드시 [가신](/topic/가신)으로 모시는 부루단지가 있다. 씨불은 가문 보존의 성화(聖火)로서 집집마다 불단지인 도기(陶器)를 두어 그 안에 숯불을 피워서 하루종일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을 가문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씨불이 꺼지면 집안에 불행이 찾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항상 불이 붙어 있게끔 식구들이 조심해서 그것을 지켰다. 불을 지피는 유일한 방법은 부쇳돌을 서로 마찰시켜 이것을 쑥에 붙이는 것이었다. 식구 모두가 씨불을 지키는 것을 씨불지킴이라고 했다. 이 씨불은 고대 한반도 민족에게는 가신(家神)의 일종이며, 어느 집에든 씨불을 묻은 불단지가 있었다. 일본에도 이 같은 민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씨불지킴 풍속은 고대 조선과 일본의 공통적인 민속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씨불을 가신(家神)으로 받든 고대 한반도 민족은 불의 신을 모신 [부엌](/topic/부엌)을 아주 소중히 여겨 청결하게 유지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당시에 조왕(竈王) 숭배의 풍속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빛은 즉 행복이며, 집안을 밝게 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끌어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어서 명절마다 이라는 횃불을 켜서 집안 구석구석까지 밝히는 관습을 낳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씨불은 사회 일반의 신으로 숭배받은 것이 아니라 한 가족 차원에서만 예배받는 데 머물렀다는 점이다. 즉 신앙이 가족적인 것이라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 가족 결합의 근본 원리를 구성한 것은 실로 이 씨불이며 이것을 가신으로 대대로 전승함으로써 가족제도의 영속성이 유지된 것이다. 고대 가족제도에서 일가단란(一家團欒)이라는 것은 늘 씨불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가족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도 씨불에서 크게 힘을 얻었다. 이러한 가족제도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화(聖火)인 씨불을 지키는 사람이다. 물론 씨불은 식구 모두가 지키는 것이지만 특히 이 씨불에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치는 일 외에 여타의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사람이 필요하였다.

고대에 이 씨불을 모시는 일은 여자가 맡았다. 여자는 음식을 요리할 때 불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성화를 모실 만한 아름다움과 청결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일종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도 그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을 취급하는 임무를 맡은 여자를 알, 아로, 알영이라고 불렀다. ‘알’은 한자로 阿老(아로)․阿利英(아리영)․閼英(알영) 등으로 한역되었다. 신라 사회에서는 월신(月神)․일신(日神)을 모시는 국가적 제사도 오로지 이 ‘알’에 의해 행해졌다. 이 ‘알[阿老]’의 어원을 찾으면 알은 얼과 동의어이며 ‘혼(魂)’을 의미한다. 즉 어원적으로 보면 알은 ‘영혼에 봉사하는 자’라는 의미가 된다. 현재 ‘母(모)’를 엄마, ‘雌(자)’를 암이라고 하는데 이 ‘엄․암’은 ‘얼․알․얼’이 변한 것으로, 고대의 여성 신성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에서 ‘親(친)’을 ‘어룬’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알[阿老]의 동어이다. 고대 모권사회(母權社會)에서 ‘親(친)’은 ‘가장이자 제사장인 여성’에 대한 호칭이었다. 이 ‘알’이 맡은 가장 큰 임무는 씨불을 지키고 이것에 기도드리는 일이었다. 이 밖에도 [고사](/topic/고사)를 지내는 임무가 있었다. 고사는 매달 씨불을 중심으로 하여 행해지는 소규모의 가족적 제사이다. 그때 알은 씨불 주위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그 앞에서 노래하고 기도를 하였다. 이 고사야말로 고대 조선의 모든 집에서 가장 신성한 행사로 행해졌다. 오늘날에는 형태가 약간 변했지만 민간의 가족적 제사라는 점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일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알’의 직무는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 며느리로부터 다음 며느리에게 전해졌다. 고대의 혼인 제도를 낳은 주요 원인은 이 씨불을 계승하기 위해 ‘알’을 맞아들이는 것에 있었다. ‘알’이 끊어지면 그 집 씨불은 사제자가 없는 씨불이 되어 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가문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그 ‘알’을 받아들여 씨불지킴이라는 성직(聖職)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혼인이란 제도가 필요하였다. 다시 말하면 가족의 결합이 씨불을 근본으로 하는 것과 같이 혼인 제도의 발생도 이 씨불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고대사회에서 혼인은 가장 신성한 행사 중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두 [가지](/topic/가지) 의미에서 중요시되었다. 하나는 제사장인 알을 받아들이기 위해, 또 하나는 아이를 낳아 또 다른 후계의 ‘알’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혼인은 가문의 최고 중대사에 속했기 때문에 그 의식도 신성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씨불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혼인의식에서 가장 특이한 행사는 횃불싸움이다.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갈 때 신랑과 신부의 집 사이에서 횃불 모의(模擬)투쟁이 벌어진다. 결국 신부 쪽에서 지는 척하고 퇴각하면 신랑 쪽이 이 기세를 타고 신부집의 불단지를 훔쳐간다. 그 후에 신부집 쪽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주고 그것을 되찾는다. 이것은 신성한 종교적 의식이다. 혼인의 의미는 다른 집 씨불과 결합되어 있는 사람 하나를 신랑이 맞아들여 자기 집의 씨불과 결합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신부집의 씨불과 신랑집 씨불 사이의 모의투쟁이 행해져, 마침내 신부집 씨불이 패배하고 도둑을 맞는다. 이는 신부가 자기 집 씨불에서 떠나 다른 집의 씨불과 결합될 때까지의 과정을 상징한 것이다. 횃불싸움이 끝나면 신랑은 신부를 데려간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들어가거나 신부가 신랑집으로 들어갈 때는 문 앞에 반드시 불을 피워 신랑 신부가 탄 가마는 꼭 이 불 위를 통과해야 했다. 이것은 불이 지닌 정화력으로 가마에 붙은 사악하고 부정한 것을 태워서 정결한 몸으로 씨불과 마주하기 위해서이다. 경북 경주에서는 짚을 태워 이것을 행하며, 충청도에서는 문굿[門神祀]을 하는데, 그때도 문 앞에서 불을 피운다. 이런 의식을 마치면 신부는 청결한 몸으로 씨불 앞에 인도되어 먼저 씨불에게 절을 한다.

북서지방에서는 신랑집 [마당](/topic/마당)에서 헛절이라는 무의미한 절을 한다. 이는 고대에 씨불 앞에서 하던 절이며, 현재는 그 대상인 씨불이 없어져서 단지 헛절이라는 흔적만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절이 끝나면 씨불 앞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려 신랑신부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한다. 이 공동 회식의 관습은 최근에도 성대하게 행해진다. 특히 서북지방에서 현저하다. 혼인식은 이 공동 회식만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의식이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신부가 앞으로 알로서 씨불지킴의 중직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가 시험하는 일이다. 신부는 혼인날 밤중 내내 씨불을 계속 지켜야 하며 씨불이 온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식구들은 옥외에서 옥내에 있는 신부가 어떻게 씨불지킴을 하는가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사제자인 신부가 씨불지킴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한다. 이날 밤의 시험에서 신부가 ‘알’로서의 중임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이 신부는 알의 직임을 이을 수 없게 되어, 혼인은 무산된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신방지킴의 관습은 이같이 오랜 연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방이란 결혼한 날의 신랑신부 [침실](/topic/침실)을 말한다. 그날 밤 [미닫이](/topic/미닫이)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부모와 형제 친척들이 번갈아 드나들며 교대로 들여다본다. 그 유래를 찾아보면 결코 의미 없는 행사가 아니다. 이 ‘신방지킴’에서 무사히 합격하면 그때부터 신부는 시어머니로부터 ‘알’직을 물려받아 가문의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이로써 혼인식은 끝난다. 고대의 혼인은 단순한 성적 관계나 일시적 애정의 결과가 아니라 씨불이라고 하는 동일한 신앙과 제사(祭祀)라고 하는 강한 결속력에 의한 합일이었다. 이런 혼인의식을 행하기 위해서는 낮보다 밤을 택하는 것이 적절하였다. 이런 이유로 고대의 혼인은 대개 밤에 행해졌다. 경기도 송도(개성)나 평안도에서의 혼인은 원칙적으로 저녁 무렵[昏]에 행해지는데, 이것도 같은 유래에서 나온 것이다.
내용『조선』에는 최남선・안확・이능화 등 저명한 국학자들의 민속 관련 글들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정신앙과 관련된 것은 일본어판 제280호(1938.9)에 실린, 장승두의 「조선 고대사회의 배화사상과 혼인제도의 연원에 관한 고찰」이다. 이 글에서 장승두는 가정신앙으로서 불 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씨불 및 씨불지킴이의 존재로 입증해 보였다. 혼인의례에서의 [횃불싸움](/topic/횃불싸움)을 비롯한 일련의 행위도 신랑집과 신부집 사이에 씨불을 놓고 벌어지는 모의쟁탈전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 한반도 민족이 가장 경이를 느낀 것은 ‘불’의 신비였다. ‘불’은 생물을 익게 하고 모든 오물을 태워서 없애는 정화력이 있으며, 게다가 항상 붉고 신비한 빛을 발하여 밤의 어두움을 몰아낸다. 그래서 고대인은 집집마다 가문 보존을 위한 신성물인 ‘씨불’을 두고 그것을 정성껏 받들었다. 불단지는 [부루단지](/topic/부루단지) 또는 업주가리라고 일컬어져 농촌에서 집집마다 재신(財神)으로 모시고 있다. ‘부루단지’의 연원은 고대의 씨불 지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루단지의 부루는 불이 변한 것으로, ‘불〔火〕’과 같은 의미이며, 부루단지는 씨불을 넣기 위해 설치된 도기(陶器)였다. 고대인은 불의 신이 [오곡](/topic/오곡)을 결실시키고 잘 익게 한다고 믿었다. 집의 재산도 불신〔火神〕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단지에다 [곡물](/topic/곡물)이 잘 열리고 풍년이 지속되고 재산이 늘어 집안이 번창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것이 후대에 이르러 불단지를 단지 재신(財神)으로 모시게 되었고, 불신〔火神〕숭배관념이 약해지면서 씨불 대신 오곡을 넣고 제사를 지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불〔火〕은 생물을 익히고 그것의 수를 불어나게 하기 때문에 불, 부루에 ‘증식(增殖)’의 의미가 생긴 모양이다.

농촌에 가면 집집마다 반드시 [가신](/topic/가신)으로 모시는 부루단지가 있다. 씨불은 가문 보존의 성화(聖火)로서 집집마다 불단지인 도기(陶器)를 두어 그 안에 숯불을 피워서 하루종일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을 가문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씨불이 꺼지면 집안에 불행이 찾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항상 불이 붙어 있게끔 식구들이 조심해서 그것을 지켰다. 불을 지피는 유일한 방법은 부쇳돌을 서로 마찰시켜 이것을 쑥에 붙이는 것이었다. 식구 모두가 씨불을 지키는 것을 씨불지킴이라고 했다. 이 씨불은 고대 한반도 민족에게는 가신(家神)의 일종이며, 어느 집에든 씨불을 묻은 불단지가 있었다. 일본에도 이 같은 민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씨불지킴 풍속은 고대 조선과 일본의 공통적인 민속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씨불을 가신(家神)으로 받든 고대 한반도 민족은 불의 신을 모신 [부엌](/topic/부엌)을 아주 소중히 여겨 청결하게 유지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당시에 조왕(竈王) 숭배의 풍속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빛은 즉 행복이며, 집안을 밝게 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끌어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어서 명절마다 이라는 횃불을 켜서 집안 구석구석까지 밝히는 관습을 낳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씨불은 사회 일반의 신으로 숭배받은 것이 아니라 한 가족 차원에서만 예배받는 데 머물렀다는 점이다. 즉 신앙이 가족적인 것이라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 가족 결합의 근본 원리를 구성한 것은 실로 이 씨불이며 이것을 가신으로 대대로 전승함으로써 가족제도의 영속성이 유지된 것이다. 고대 가족제도에서 일가단란(一家團欒)이라는 것은 늘 씨불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가족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도 씨불에서 크게 힘을 얻었다. 이러한 가족제도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화(聖火)인 씨불을 지키는 사람이다. 물론 씨불은 식구 모두가 지키는 것이지만 특히 이 씨불에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치는 일 외에 여타의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사람이 필요하였다.

고대에 이 씨불을 모시는 일은 여자가 맡았다. 여자는 음식을 요리할 때 불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성화를 모실 만한 아름다움과 청결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일종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도 그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을 취급하는 임무를 맡은 여자를 알, 아로, 알영이라고 불렀다. ‘알’은 한자로 阿老(아로)․阿利英(아리영)․閼英(알영) 등으로 한역되었다. 신라 사회에서는 월신(月神)․일신(日神)을 모시는 국가적 제사도 오로지 이 ‘알’에 의해 행해졌다. 이 ‘알[阿老]’의 어원을 찾으면 알은 얼과 동의어이며 ‘혼(魂)’을 의미한다. 즉 어원적으로 보면 알은 ‘영혼에 봉사하는 자’라는 의미가 된다. 현재 ‘母(모)’를 엄마, ‘雌(자)’를 암이라고 하는데 이 ‘엄․암’은 ‘얼․알․얼’이 변한 것으로, 고대의 여성 신성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에서 ‘親(친)’을 ‘어룬’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알[阿老]의 동어이다. 고대 모권사회(母權社會)에서 ‘親(친)’은 ‘가장이자 제사장인 여성’에 대한 호칭이었다. 이 ‘알’이 맡은 가장 큰 임무는 씨불을 지키고 이것에 기도드리는 일이었다. 이 밖에도 [고사](/topic/고사)를 지내는 임무가 있었다. 고사는 매달 씨불을 중심으로 하여 행해지는 소규모의 가족적 제사이다. 그때 알은 씨불 주위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그 앞에서 노래하고 기도를 하였다. 이 고사야말로 고대 조선의 모든 집에서 가장 신성한 행사로 행해졌다. 오늘날에는 형태가 약간 변했지만 민간의 가족적 제사라는 점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일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알’의 직무는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 며느리로부터 다음 며느리에게 전해졌다. 고대의 혼인 제도를 낳은 주요 원인은 이 씨불을 계승하기 위해 ‘알’을 맞아들이는 것에 있었다. ‘알’이 끊어지면 그 집 씨불은 사제자가 없는 씨불이 되어 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가문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그 ‘알’을 받아들여 씨불지킴이라는 성직(聖職)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혼인이란 제도가 필요하였다. 다시 말하면 가족의 결합이 씨불을 근본으로 하는 것과 같이 혼인 제도의 발생도 이 씨불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고대사회에서 혼인은 가장 신성한 행사 중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두 [가지](/topic/가지) 의미에서 중요시되었다. 하나는 제사장인 알을 받아들이기 위해, 또 하나는 아이를 낳아 또 다른 후계의 ‘알’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혼인은 가문의 최고 중대사에 속했기 때문에 그 의식도 신성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씨불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혼인의식에서 가장 특이한 행사는 횃불싸움이다.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갈 때 신랑과 신부의 집 사이에서 횃불 모의(模擬)투쟁이 벌어진다. 결국 신부 쪽에서 지는 척하고 퇴각하면 신랑 쪽이 이 기세를 타고 신부집의 불단지를 훔쳐간다. 그 후에 신부집 쪽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주고 그것을 되찾는다. 이것은 신성한 종교적 의식이다. 혼인의 의미는 다른 집 씨불과 결합되어 있는 사람 하나를 신랑이 맞아들여 자기 집의 씨불과 결합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신부집의 씨불과 신랑집 씨불 사이의 모의투쟁이 행해져, 마침내 신부집 씨불이 패배하고 도둑을 맞는다. 이는 신부가 자기 집 씨불에서 떠나 다른 집의 씨불과 결합될 때까지의 과정을 상징한 것이다. 횃불싸움이 끝나면 신랑은 신부를 데려간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들어가거나 신부가 신랑집으로 들어갈 때는 문 앞에 반드시 불을 피워 신랑 신부가 탄 가마는 꼭 이 불 위를 통과해야 했다. 이것은 불이 지닌 정화력으로 가마에 붙은 사악하고 부정한 것을 태워서 정결한 몸으로 씨불과 마주하기 위해서이다. 경북 경주에서는 짚을 태워 이것을 행하며, 충청도에서는 문굿[門神祀]을 하는데, 그때도 문 앞에서 불을 피운다. 이런 의식을 마치면 신부는 청결한 몸으로 씨불 앞에 인도되어 먼저 씨불에게 절을 한다.

북서지방에서는 신랑집 [마당](/topic/마당)에서 헛절이라는 무의미한 절을 한다. 이는 고대에 씨불 앞에서 하던 절이며, 현재는 그 대상인 씨불이 없어져서 단지 헛절이라는 흔적만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절이 끝나면 씨불 앞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려 신랑신부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한다. 이 공동 회식의 관습은 최근에도 성대하게 행해진다. 특히 서북지방에서 현저하다. 혼인식은 이 공동 회식만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의식이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신부가 앞으로 알로서 씨불지킴의 중직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가 시험하는 일이다. 신부는 혼인날 밤중 내내 씨불을 계속 지켜야 하며 씨불이 온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식구들은 옥외에서 옥내에 있는 신부가 어떻게 씨불지킴을 하는가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사제자인 신부가 씨불지킴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한다. 이날 밤의 시험에서 신부가 ‘알’로서의 중임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이 신부는 알의 직임을 이을 수 없게 되어, 혼인은 무산된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신방지킴의 관습은 이같이 오랜 연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방이란 결혼한 날의 신랑신부 [침실](/topic/침실)을 말한다. 그날 밤 [미닫이](/topic/미닫이)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부모와 형제 친척들이 번갈아 드나들며 교대로 들여다본다. 그 유래를 찾아보면 결코 의미 없는 행사가 아니다. 이 ‘신방지킴’에서 무사히 합격하면 그때부터 신부는 시어머니로부터 ‘알’직을 물려받아 가문의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이로써 혼인식은 끝난다. 고대의 혼인은 단순한 성적 관계나 일시적 애정의 결과가 아니라 씨불이라고 하는 동일한 신앙과 제사(祭祀)라고 하는 강한 결속력에 의한 합일이었다. 이런 혼인의식을 행하기 위해서는 낮보다 밤을 택하는 것이 적절하였다. 이런 이유로 고대의 혼인은 대개 밤에 행해졌다. 경기도 송도(개성)나 평안도에서의 혼인은 원칙적으로 저녁 무렵[昏]에 행해지는데, 이것도 같은 유래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조선』이란 이름으로 내기 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월보(朝鮮總督府月報)』(1911.6~1915.2), 『조선휘보(朝鮮彙報)』(1915~1920.6)로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발행하다가 1920년 7월호부터 『조선(朝鮮)』으로 개명해 발행하였다. 『조선』지는 일문판과 국문판 두 [가지](/topic/가지)가 있다. 그 동안의 통념과 다르게 발행 시기는 물론 내용도 별개이다. 일문판 원본은 현재 1920년 7월호(66호)부터 1944년 11․12월 합병호(353호)까지의 것만 일본 국회도서관과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국문판의 원본은 현재 1924년 1월호(76호)부터 1934년 3월호(197호, 이 가운데에서 82~92호는 결본)가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없는 것 중에서 1920년 12월호(39호), 1921년 12월호(51호), 1923년 2월호(65호)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문판 『조선』은 1986년에 고려서림에서 출판한 영인본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국사편찬위원회 도서관 등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어 활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문판 『조선』은 그 문예 관련 자료만 발췌해 1999년 무렵에 도서출판 서광에서 영인본으로 출판한 것이 전부이다.
역사『조선』이란 이름으로 내기 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월보(朝鮮總督府月報)』(1911.6~1915.2), 『조선휘보(朝鮮彙報)』(1915~1920.6)로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발행하다가 1920년 7월호부터 『조선(朝鮮)』으로 개명해 발행하였다. 『조선』지는 일문판과 국문판 두 [가지](/topic/가지)가 있다. 그 동안의 통념과 다르게 발행 시기는 물론 내용도 별개이다. 일문판 원본은 현재 1920년 7월호(66호)부터 1944년 11․12월 합병호(353호)까지의 것만 일본 국회도서관과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국문판의 원본은 현재 1924년 1월호(76호)부터 1934년 3월호(197호, 이 가운데에서 82~92호는 결본)가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없는 것 중에서 1920년 12월호(39호), 1921년 12월호(51호), 1923년 2월호(65호)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문판 『조선』은 1986년에 고려서림에서 출판한 영인본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국사편찬위원회 도서관 등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어 활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문판 『조선』은 그 문예 관련 자료만 발췌해 1999년 무렵에 도서출판 서광에서 영인본으로 출판한 것이 전부이다.
의의『조선』에는 그 전신인 『조선총독부월보』와 『조선휘보』와는 달리 민속 및 국학 전반에 관련한 연구 성과가 상당수 실려 있어 주목된다. 민속학을 비롯한 우리 국학 연구의 시작을 1920년대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기 때문에, 결국 『조선』에 수록된 민속 관련 논문들은 초기(제1기)의 연구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위에서 소개한 가정신앙 관련 논문은 물론 「[주몽신화](/topic/주몽신화)의 민속학적 고찰」, 「단군전설의 민속학적 고찰」 등 장승두가 쓴 민속 관계 논문이 이 잡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최남선의 선구적인 업적에 바로 이어서 나온 논문들임에도 아직 연구사에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다. 장승두를 비롯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자들의 논문 외에 최남선․안확․이능화 같은 저명한 초기 국학자의 논문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등 일본인 학자의 논문들도 수록되어 있다. 단행본으로 낸 책들의 대부분이 이 『조선』에 먼저 게재되었던 논문을 한데 모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지는 초기의 민속 혹은 국학 연구의 상황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잡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지에 실린 논문들을 검토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의미의 민속연구나 민속연구사의 서술은 기대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조선』지에 실린 글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인권환의 『한국민속학사』(1978), 이가원의 「한문학의 발달」, 『한국학연구입문』(1981), 최인학의 『한국민속학문헌총목록』(1986), 소재영의 『한국고전문학관계 연구논저총목록』(1993) 등에서 『조선』지에 발표된 일부 논문의 제목 소개가 이루어졌지만 원문 내용의 전모를 접할 기회는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았다. 국문판 『조선』지에 발표된 민속․국문학 관계 논문은 그것대로 소중하다. 김지원의 [민요](/topic/민요) 관련 논저와 민요 채록 자료를 비롯하여 김백당의 동요 채록 자료와 이원규의 고전시가 관련 논문은 초기 연구 성과로서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기관지 일어판 『조선』지의 민속․국문학자료 (이복규․김기서, 민속원, 2004)
의의『조선』에는 그 전신인 『조선총독부월보』와 『조선휘보』와는 달리 민속 및 국학 전반에 관련한 연구 성과가 상당수 실려 있어 주목된다. 민속학을 비롯한 우리 국학 연구의 시작을 1920년대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기 때문에, 결국 『조선』에 수록된 민속 관련 논문들은 초기(제1기)의 연구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위에서 소개한 가정신앙 관련 논문은 물론 「[주몽신화](/topic/주몽신화)의 민속학적 고찰」, 「단군전설의 민속학적 고찰」 등 장승두가 쓴 민속 관계 논문이 이 잡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최남선의 선구적인 업적에 바로 이어서 나온 논문들임에도 아직 연구사에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다. 장승두를 비롯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학자들의 논문 외에 최남선․안확․이능화 같은 저명한 초기 국학자의 논문도 여러 편 들어 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등 일본인 학자의 논문들도 수록되어 있다. 단행본으로 낸 책들의 대부분이 이 『조선』에 먼저 게재되었던 논문을 한데 모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지는 초기의 민속 혹은 국학 연구의 상황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잡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지에 실린 논문들을 검토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의미의 민속연구나 민속연구사의 서술은 기대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조선』지에 실린 글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인권환의 『한국민속학사』(1978), 이가원의 「한문학의 발달」, 『한국학연구입문』(1981), 최인학의 『한국민속학문헌총목록』(1986), 소재영의 『한국고전문학관계 연구논저총목록』(1993) 등에서 『조선』지에 발표된 일부 논문의 제목 소개가 이루어졌지만 원문 내용의 전모를 접할 기회는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았다. 국문판 『조선』지에 발표된 민속․국문학 관계 논문은 그것대로 소중하다. 김지원의 [민요](/topic/민요) 관련 논저와 민요 채록 자료를 비롯하여 김백당의 동요 채록 자료와 이원규의 고전시가 관련 논문은 초기 연구 성과로서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기관지 일어판 『조선』지의 민속․국문학자료 (이복규․김기서, 민속원, 2004)
아세아문화사새로 쓴 한국무속최길성1999
도서출판 창솔한국민속문화대사전김용덕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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