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죽령 일대에서 산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여신. 지혜와 용기로 재물을 약탈하는 도둑떼를 물리치고 [마을](/topic/마을)과 나라를 평안하게 해 준 공으로 신격화되었다. |
---|---|
mp3Cnt | 0 |
wkorname | 이정재 |
정의 | 죽령 일대에서 산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여신. 지혜와 용기로 재물을 약탈하는 도둑떼를 물리치고 [마을](/topic/마을)과 나라를 평안하게 해 준 공으로 신격화되었다. | 정의 | 죽령 일대에서 산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여신. 지혜와 용기로 재물을 약탈하는 도둑떼를 물리치고 [마을](/topic/마을)과 나라를 평안하게 해 준 공으로 신격화되었다. | 내용 | 다자구할머니와 관련된 설화를 통해 다자구할머니 신격의 유래를 알 수 있다. 관련 설화는 다음과 같이 약술된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서 경상도 풍기군으로 넘어가는 죽령고개는 길이 길고도 험하였다. 주요 물자의 유통로인 이곳에는 도둑떼가 들끓어서 행인을 괴롭혔다. 관가에서 군사를풀어 잡으려 했으나 산의 지리를 잘 아는 도둑들은 험한 산으로 달아나곤 하여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도둑들에게 가산을 모두 빼앗긴 할머니 한 분이 관가에 찾아와서 도둑을 잡겠다며 방법을 말한다. 산속에 깊숙이 군졸을 숨겨 놓고 할머니가 산속으로 들어가 아들을 찾으러간 것처럼 하여 도둑들의 은신처를 알려 주면 와서 잡으라는 것이다. 그대로 하기로 하고 할머니는 산속으로 들어가 다자구야 더자구야 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다닌다. 이를 본 도둑들이 할머니에게 묻자 아들의 호환으로 찾아다닌다고 하자, 올데갈데 없는 할머니에게 밥을 해 주며 함께 거주하자고 한다. 좋다고 하며 도둑들이 자지 않을 때는할머니는 다자구야 더자구야 하면서 늘 노래처럼 불렀다. 어느 날 하루는 두목의 생일에 도둑들은 대낮부터 술을 실컷 마시며 놀았다. 한밤이 되자 모두 녹아떨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할머니는 다자구야 더자구야 하는 노래를불렀다. 이를 들은 관군이 급히 달려와 도둑을 모두 잡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추어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할머니를 다자구할머니라 부르고, 할머니가 죽어서 죽령산신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런 서사로 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 분포 양상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당신화 다자구할머니(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다자구할머니 산신당(단양군 단양읍), 다자구 덜자구(경기도 양평군), 삼천병마골 피흘고개(경기도 시흥시), 부산성(경북 경주시), 조수만 [장군](/topic/장군)과 다자구 덜자구 계략(대구 북구), 마고할매 전설(경북 영주시) 등이다. 이야기의 특징은 대체로 비슷하게 전승되고 있고, 지역적·시기적 차이를 보이는 정도이다. 즉 도적떼 대신 왜적·역모군·백제군 등의 차이를 보이고 주인공도 할머니가 아닌여인이나 마고할매 등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이본들에서 일치하는 점은 주인공의 계략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즉 ‘다 잔다’는 의미의 이름 ‘다자구야’와 ‘다 깨어 있다’는 의미의 ‘덜자구야’는 아군으로부터의 공격을 의미하는 신호 계략으로 동일하다. | 내용 | 다자구할머니와 관련된 설화를 통해 다자구할머니 신격의 유래를 알 수 있다. 관련 설화는 다음과 같이 약술된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서 경상도 풍기군으로 넘어가는 죽령고개는 길이 길고도 험하였다. 주요 물자의 유통로인 이곳에는 도둑떼가 들끓어서 행인을 괴롭혔다. 관가에서 군사를풀어 잡으려 했으나 산의 지리를 잘 아는 도둑들은 험한 산으로 달아나곤 하여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도둑들에게 가산을 모두 빼앗긴 할머니 한 분이 관가에 찾아와서 도둑을 잡겠다며 방법을 말한다. 산속에 깊숙이 군졸을 숨겨 놓고 할머니가 산속으로 들어가 아들을 찾으러간 것처럼 하여 도둑들의 은신처를 알려 주면 와서 잡으라는 것이다. 그대로 하기로 하고 할머니는 산속으로 들어가 다자구야 더자구야 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다닌다. 이를 본 도둑들이 할머니에게 묻자 아들의 호환으로 찾아다닌다고 하자, 올데갈데 없는 할머니에게 밥을 해 주며 함께 거주하자고 한다. 좋다고 하며 도둑들이 자지 않을 때는할머니는 다자구야 더자구야 하면서 늘 노래처럼 불렀다. 어느 날 하루는 두목의 생일에 도둑들은 대낮부터 술을 실컷 마시며 놀았다. 한밤이 되자 모두 녹아떨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할머니는 다자구야 더자구야 하는 노래를불렀다. 이를 들은 관군이 급히 달려와 도둑을 모두 잡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추어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할머니를 다자구할머니라 부르고, 할머니가 죽어서 죽령산신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런 서사로 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 분포 양상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당신화 다자구할머니(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다자구할머니 산신당(단양군 단양읍), 다자구 덜자구(경기도 양평군), 삼천병마골 피흘고개(경기도 시흥시), 부산성(경북 경주시), 조수만 [장군](/topic/장군)과 다자구 덜자구 계략(대구 북구), 마고할매 전설(경북 영주시) 등이다. 이야기의 특징은 대체로 비슷하게 전승되고 있고, 지역적·시기적 차이를 보이는 정도이다. 즉 도적떼 대신 왜적·역모군·백제군 등의 차이를 보이고 주인공도 할머니가 아닌여인이나 마고할매 등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이본들에서 일치하는 점은 주인공의 계략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즉 ‘다 잔다’는 의미의 이름 ‘다자구야’와 ‘다 깨어 있다’는 의미의 ‘덜자구야’는 아군으로부터의 공격을 의미하는 신호 계략으로 동일하다. | 지역사례 | 다자구할머니 이야기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지만 가장 빈번하게 수집되는 지역은 죽령 일대이다.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있는 죽령산신제를 들 수 있다. 이 관련성은 용부원 3리의 주민이 세운 다음의 비문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다자구야! 들자구야! 도적떼 난립하니 [소백산](/topic/소백산) 인심 흉흉하고 사회질서 어지럽구나. 다자구할머니 소리쳐 노래부르니, 관가에서 도적떼 토벌하고 후박한 인심 속에 충·효·예 꽃 피우네. (중략). 우리 [마을](/topic/마을)의 전통을 자자손손 자랑하고 보존하고자 주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죽령산신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행해 오던 ‘죽령국행제’와의 상관성이 부각되면서 구체화되기도 한다.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산신당의 성립은 앞에서 약술한 다자구할머니의 산신 내력담에서 비롯된다. 산신당의 [현판](/topic/현판)은 「죽령산신당(竹嶺山神堂)」이라 쓰여 있고, 당 안에는 ‘죽령산지신(竹嶺山之神)’이라 쓴 [위패](/topic/위패)가 함 안에 보관되어 모셔져 있다. 죽령산신제 관련 기록은『 태종실록』에 보인다. 태종 14년에 악(嶽), 해(海), 독(瀆)을 중사(中祀)로 여러 산천을 소사(小祀)로 정해 국행의례를 소재 관청에서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충청지방의 소사는 계룡산(鷄龍山), 죽령산(竹嶺山), 양진명소(楊津溟所) 등으로 지정되었다. 이를 볼 때 죽령국행제는 죽령산신제와의 상관성을 충분히 산정할 수 있고, 그 전통은 그 이전의 고대로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자료로 죽령산 중수재건기에는 “죽령산신당은 사우(祠宇)가 쓰러질 지경에 이르러 이에 춘삼월에 중수재건한 것을 도감(都監)이 아룁니다. 단기 4228년 무자년 3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의 유교적 이념에 따른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기존에있던 산신당이나 성황당을 사우로 바꾸어 지속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된 신화도 조사되고 있다. 즉 다자구할머니 산신당 기원신화가 되는 셈이다. 용부원3리에 거주하는 김성락(1918년생)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 다자구할머니가 도둑을 잡고 나자 나라에 세금이 막 올라간다. 그러니 도둑을 누가 잡았나 찾아 공을 세울라고수소문하자 도무지 누가 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의 꿈에 다자구할머니가 현몽을 한다. ‘도둑을 잡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죽령산신인데 내가 잡았으니나의 공을 알리려면 서울에서 연을 띄워 연 앉는 자리에다 내 [사당](/topic/사당)을 지어 춘추로 제를 올리라’ 이튿날 문무대신을 불러 연을 만들어 띄웠는데, 연이 앉은 자리에 사당을 만들어 제를 올리게 되었다. 그 자리가 지금 요 자리 큰 옻나무가 있는 곳이다”라고 한다. 이곳이 현재 죽령산신당이 서 있는 곳이다. 죽령산신당의 유래담은 다자구할머니 이야기의 신화적 특징에서도 사당기원신화와 서로 일치한다. 즉 죽어서 죽령 산신이 되었다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이밖에이 지역 사람들은 산신으로 다자구할머니를 인정하고 있으며, 산신당의 영험함을 두루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격은 정기적인 제의를 치르면서 확인되고 신성성을 부여받는다. 죽령산신제는 조선의 국행의례적 절차를 거쳐 오늘까지 산신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산신제의 절차를 보면국행의례의 전통을 전승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산신제는 2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다. 미리 선출된 도가에서 제수를 준비하고 제의 당일 두 줄로 진설한다. 앞줄에 왼쪽부터 [사과](/topic/사과), [수박](/topic/수박), 배, 시루, 떡, [참외](/topic/참외), 감, 밤, [대추](/topic/대추) 등을 목기에 담아 진설한다. 뒷줄에는 돼지머리, 적, 메 등과 술잔을 진설하고 양쪽에 [촛대](/topic/촛대)를 놓는다. 의례가 시작되면 산신당 정면 아래 관복 차림의 [초헌](/topic/초헌)관, [아헌](/topic/아헌)관, [종헌](/topic/종헌)관이 흰색의 홀을 들고 선다. 그 뒤에는 남자 30여 명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제의 진행은 유교식으로 집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다. 현재 산신제는 더 이상 관에서 주도하지 않지만 민간에서 다자구할머니의 영험함과 신성성이 하나의 종교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러 연구 자료가 입증하고 있다. 봄과 가을에 주기적으로 행해지는 산신제는 주민들의 풍요와 평안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다자구할머니 설화가 초등학교 국어교과서(국어 말하기 듣기 쓰기 4-1)에 실린 뒤에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더욱 그렇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여 일각에서는 조선시대 국행의례의 전통을 살려 민속문화재로 지정하여 산신당의 위상을 승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 참고문헌 | 다자구할머니 설화의 신화적 연구 (이창식 외, 동아시아고대학 7, 동아시아고대학회, 2003) 죽령국행제 조사연구 (이창식,박이정, 2003) 죽령산신당 당신화‘ 다자구할머니’와 죽령산신제 (최운식, 한국민속학 39, 한국민속학회, 2004) 마고할미와 다자구할머니 설화의전승양상 (김영선, 세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 지역사례 | 다자구할머니 이야기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지만 가장 빈번하게 수집되는 지역은 죽령 일대이다.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있는 죽령산신제를 들 수 있다. 이 관련성은 용부원 3리의 주민이 세운 다음의 비문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다자구야! 들자구야! 도적떼 난립하니 [소백산](/topic/소백산) 인심 흉흉하고 사회질서 어지럽구나. 다자구할머니 소리쳐 노래부르니, 관가에서 도적떼 토벌하고 후박한 인심 속에 충·효·예 꽃 피우네. (중략). 우리 [마을](/topic/마을)의 전통을 자자손손 자랑하고 보존하고자 주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죽령산신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행해 오던 ‘죽령국행제’와의 상관성이 부각되면서 구체화되기도 한다.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산신당의 성립은 앞에서 약술한 다자구할머니의 산신 내력담에서 비롯된다. 산신당의 [현판](/topic/현판)은 「죽령산신당(竹嶺山神堂)」이라 쓰여 있고, 당 안에는 ‘죽령산지신(竹嶺山之神)’이라 쓴 [위패](/topic/위패)가 함 안에 보관되어 모셔져 있다. 죽령산신제 관련 기록은『 태종실록』에 보인다. 태종 14년에 악(嶽), 해(海), 독(瀆)을 중사(中祀)로 여러 산천을 소사(小祀)로 정해 국행의례를 소재 관청에서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충청지방의 소사는 계룡산(鷄龍山), 죽령산(竹嶺山), 양진명소(楊津溟所) 등으로 지정되었다. 이를 볼 때 죽령국행제는 죽령산신제와의 상관성을 충분히 산정할 수 있고, 그 전통은 그 이전의 고대로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자료로 죽령산 중수재건기에는 “죽령산신당은 사우(祠宇)가 쓰러질 지경에 이르러 이에 춘삼월에 중수재건한 것을 도감(都監)이 아룁니다. 단기 4228년 무자년 3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의 유교적 이념에 따른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기존에있던 산신당이나 성황당을 사우로 바꾸어 지속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된 신화도 조사되고 있다. 즉 다자구할머니 산신당 기원신화가 되는 셈이다. 용부원3리에 거주하는 김성락(1918년생)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 다자구할머니가 도둑을 잡고 나자 나라에 세금이 막 올라간다. 그러니 도둑을 누가 잡았나 찾아 공을 세울라고수소문하자 도무지 누가 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의 꿈에 다자구할머니가 현몽을 한다. ‘도둑을 잡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죽령산신인데 내가 잡았으니나의 공을 알리려면 서울에서 연을 띄워 연 앉는 자리에다 내 [사당](/topic/사당)을 지어 춘추로 제를 올리라’ 이튿날 문무대신을 불러 연을 만들어 띄웠는데, 연이 앉은 자리에 사당을 만들어 제를 올리게 되었다. 그 자리가 지금 요 자리 큰 옻나무가 있는 곳이다”라고 한다. 이곳이 현재 죽령산신당이 서 있는 곳이다. 죽령산신당의 유래담은 다자구할머니 이야기의 신화적 특징에서도 사당기원신화와 서로 일치한다. 즉 죽어서 죽령 산신이 되었다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이밖에이 지역 사람들은 산신으로 다자구할머니를 인정하고 있으며, 산신당의 영험함을 두루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격은 정기적인 제의를 치르면서 확인되고 신성성을 부여받는다. 죽령산신제는 조선의 국행의례적 절차를 거쳐 오늘까지 산신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산신제의 절차를 보면국행의례의 전통을 전승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산신제는 2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다. 미리 선출된 도가에서 제수를 준비하고 제의 당일 두 줄로 진설한다. 앞줄에 왼쪽부터 [사과](/topic/사과), [수박](/topic/수박), 배, 시루, 떡, [참외](/topic/참외), 감, 밤, [대추](/topic/대추) 등을 목기에 담아 진설한다. 뒷줄에는 돼지머리, 적, 메 등과 술잔을 진설하고 양쪽에 [촛대](/topic/촛대)를 놓는다. 의례가 시작되면 산신당 정면 아래 관복 차림의 [초헌](/topic/초헌)관, [아헌](/topic/아헌)관, [종헌](/topic/종헌)관이 흰색의 홀을 들고 선다. 그 뒤에는 남자 30여 명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제의 진행은 유교식으로 집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다. 현재 산신제는 더 이상 관에서 주도하지 않지만 민간에서 다자구할머니의 영험함과 신성성이 하나의 종교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러 연구 자료가 입증하고 있다. 봄과 가을에 주기적으로 행해지는 산신제는 주민들의 풍요와 평안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다자구할머니 설화가 초등학교 국어교과서(국어 말하기 듣기 쓰기 4-1)에 실린 뒤에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더욱 그렇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여 일각에서는 조선시대 국행의례의 전통을 살려 민속문화재로 지정하여 산신당의 위상을 승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 참고문헌 | 다자구할머니 설화의 신화적 연구 (이창식 외, 동아시아고대학 7, 동아시아고대학회, 2003) 죽령국행제 조사연구 (이창식,박이정, 2003) 죽령산신당 당신화‘ 다자구할머니’와 죽령산신제 (최운식, 한국민속학 39, 한국민속학회, 2004) 마고할미와 다자구할머니 설화의전승양상 (김영선, 세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