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당할머니인 중구(重九)할머니에게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하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소죽리 소죽마을의 당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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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이영금 |
정의 | 당할머니인 중구(重九)할머니에게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하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소죽리 소죽마을의 당제. | 정의 | 당할머니인 중구(重九)할머니에게 [마을](/topic/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하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소죽리 소죽마을의 당제. | 내용 | 소죽[마을](/topic/마을)은 송지면 일대에서 유일하게 중구제를 지내는 곳이다. 이 마을의 중구제는 매년 음력 구월 초아흐렛날 새벽 4시에 진행된다. 현재는 스님 주도로 간소하게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과거에는 무당, [제관](/topic/제관), 군고패가 연합하여 매우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과거에 행하던 제사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소죽마을 사람들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제의보다 중구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마을에 초상이 나거나 누구 집에 강아지만 낳아도 제일을 다음 달로 연기할 정도로 마을 사람들은 중구제를 매우 엄격하게 지냈다. 중구제가 가까울 즈음에 출산을 앞둔 임부가 있으면 그 임부는 다른 곳에 가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중구제를 지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팔월 그믐날에 마을회의를 하여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에 적합한 사람들을 제관으로 선정했다. 제관은 여자 제주 한 명, 남자 제주 한 명, ‘바리채’라고 부르는 심부름꾼 다섯 명 등이었다. 이 밖에도 이 마을에 사는 무당이 고정적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제주는 주로 나이든 사람이 선정되었다. 특히 여자 제주는 폐경을 한 깨끗한 사람이어야 했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구월 초하룻날부터 초여드렛날까지 금기를 엄격히 지켰다. [평상](/topic/평상)시에도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소변이나 대변을 보고 나서 찬물로 목욕재계했다. 남들과 언쟁도 하지 않았으며, 상갓집 등 부정한 곳에는 절대 [가지](/topic/가지) 않았다. 제관 댁에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을 멀리 하였고, 일반 가정집에도 황토를 뿌렸다. 마을 사람들은 제일 하루 전날 새벽녘에 안길, 길가, 집안 등을 청소하고 마을 공동[우물](/topic/우물)을 퍼낸 다음 우물 근처에 [금줄](/topic/금줄)을 쳤다. 그러고 나서 우물에 차일을 치고 제장에 영(令)을 꽂았다. 우물에 금줄을 치면 제물을 마련하는 여자 제주 이외에는 누구도 이 우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여자 제주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물을 마련하였다. 제물은 메 일곱 그릇, 국 일곱 그릇, 민어 한 마리, 조기 일곱 마리, 군고기 일곱 점, 감 일곱 개, 떡 석 되, 돌갓(도라지), 고사리, [숙주나물](/topic/숙주나물), 듬북 등이었다. 도라지, 숙주나물, 고사리 등은 반드시 제사상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중구제를 지낼 때 이 세 가지 나물은 꼭 차린다. 중구제가 있는 구월 초아흐렛날 새벽에는 이 마을 무당, 제관, 군고패가 함께 당산나무가 있는 중구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렸다. 최근에는 소나무가 사라져 새로 생긴 당집 안에다 제물을 차리지만 과거에는 소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상차림이 끝나면 군고패가 [나발](/topic/나발), 북, [꽹과리](/topic/꽹과리)를 치면서 제사가 시작함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군고패는 제사를 시작할 때, 제사 중간, 제사가 끝날 때 등 모두 세 번에 걸쳐 풍물을 쳤다. 마을 사람들은 군고패의 풍물 소리를 들으며 제사의 진행 상황을 알게 되었다. 제사가 시작되면 남자 제주가 절을 세 번 하고 술을 올렸다. 이후 제주는 소지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했다. 소지를 올릴 때는 방지소지를 맨 먼저 올렸다. 그런 뒤 할머니, 제주, 이장, 지도자, 장수(長壽)한 자, 중년남자, 소년, 어린이, 복무자(군인, 객지, 타향), 득남, [가축](/topic/가축) 등을 위한 소지를 차례로 올렸다. 제관에 의한 유교식 제사가 끝나고 나면 이 마을 무당이 간단하게 [비손](/topic/비손)을 하며 마을의 안녕과 무탈을 기원했다. 이후에 제주는 [창호지](/topic/창호지)에 메와 민어를 싸서 당산나무 밑에다 묻었다. 그런 다음 짚을 땅에 깔고 밥과 나물 등을 놓아 잡신들에게 [헌식](/topic/헌식)하였다. 중구제를 지낸 이튿날 아침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막걸리를 나눠 들고 풍물을 치며 어울려 놀았다. 제사 비용은 밭 두[마지기](/topic/마지기)의 소출에서 해결하였고 (제주에게는 수고비 명분으로 나락 한 [가마니](/topic/가마니)를 주었다) 나머지 경비는 정월대보름날 [[마당](/topic/마당)밟이](/topic/마당밟이) 때 마을 사람들로부터 걷은 돈을 사용했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다양한 방식으로 중구제를 지내다가 최근에는 매우 간소하게 지내고 있다. 과거처럼 제관도 선정되지 않으며, 지켜야 할 금기도 따로 없다. 소죽마을에는 주로 노인들만 살고 있기 때문에 제물을 마련하거나 풍물을 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래도 제사를 중단할 수 없어서 2006년부터는 동네 절의 스님을 모셔다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물도 스님이 마련해 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따로 장만하지 않는다. 중구제 하루 전날에는 마을 이장이 마을 공동우물을 퍼내고 금줄을 친다. 구월 초아흐렛날 새벽 4시쯤이 되면 마을 이장, 새마을지도자, 개발위원장, 스님 등 네 명은 당집에 올라간다. 당집 안에 제물을 차려 놓으면 이들이 당집 바깥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제사의 시작을 알리는 풍물을 친다. 현재 풍물은 당집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당집에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 풍물을 치지 않는다. 제사는 30분가량 진행되며, 스님이 목탁을 치면서 불경을 읊는 방식으로 제사를 모신다. 마지막에는 스님이 소지를 올리면서 마을 사람들과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한다. 과거에는 중구제를 마치고 동네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어울려 놀았지만 지금은 스님이 음식을 간단히 챙겨 오기 때문에 나누어 먹는 일은 없다. 이처럼 소죽마을 중구제가 많이 약화되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간단하게라도 이 제의가 지속되길 희망하고 있다. 선조들이 남긴 유산이기도 하고, 제사가 중단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당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참고문헌 | 해남군의 문화유적 (해남군, 1986) [마을](/topic/마을)유래지 (해남군, 1987) 문화유적분포지도-전남 해남군 (해남군, 2002) | 내용 | 소죽[마을](/topic/마을)은 송지면 일대에서 유일하게 중구제를 지내는 곳이다. 이 마을의 중구제는 매년 음력 구월 초아흐렛날 새벽 4시에 진행된다. 현재는 스님 주도로 간소하게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과거에는 무당, [제관](/topic/제관), 군고패가 연합하여 매우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과거에 행하던 제사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소죽마을 사람들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제의보다 중구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마을에 초상이 나거나 누구 집에 강아지만 낳아도 제일을 다음 달로 연기할 정도로 마을 사람들은 중구제를 매우 엄격하게 지냈다. 중구제가 가까울 즈음에 출산을 앞둔 임부가 있으면 그 임부는 다른 곳에 가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중구제를 지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팔월 그믐날에 마을회의를 하여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에 적합한 사람들을 제관으로 선정했다. 제관은 여자 제주 한 명, 남자 제주 한 명, ‘바리채’라고 부르는 심부름꾼 다섯 명 등이었다. 이 밖에도 이 마을에 사는 무당이 고정적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제주는 주로 나이든 사람이 선정되었다. 특히 여자 제주는 폐경을 한 깨끗한 사람이어야 했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구월 초하룻날부터 초여드렛날까지 금기를 엄격히 지켰다. [평상](/topic/평상)시에도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소변이나 대변을 보고 나서 찬물로 목욕재계했다. 남들과 언쟁도 하지 않았으며, 상갓집 등 부정한 곳에는 절대 [가지](/topic/가지) 않았다. 제관 댁에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을 멀리 하였고, 일반 가정집에도 황토를 뿌렸다. 마을 사람들은 제일 하루 전날 새벽녘에 안길, 길가, 집안 등을 청소하고 마을 공동[우물](/topic/우물)을 퍼낸 다음 우물 근처에 [금줄](/topic/금줄)을 쳤다. 그러고 나서 우물에 차일을 치고 제장에 영(令)을 꽂았다. 우물에 금줄을 치면 제물을 마련하는 여자 제주 이외에는 누구도 이 우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여자 제주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물을 마련하였다. 제물은 메 일곱 그릇, 국 일곱 그릇, 민어 한 마리, 조기 일곱 마리, 군고기 일곱 점, 감 일곱 개, 떡 석 되, 돌갓(도라지), 고사리, [숙주나물](/topic/숙주나물), 듬북 등이었다. 도라지, 숙주나물, 고사리 등은 반드시 제사상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중구제를 지낼 때 이 세 가지 나물은 꼭 차린다. 중구제가 있는 구월 초아흐렛날 새벽에는 이 마을 무당, 제관, 군고패가 함께 당산나무가 있는 중구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렸다. 최근에는 소나무가 사라져 새로 생긴 당집 안에다 제물을 차리지만 과거에는 소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상차림이 끝나면 군고패가 [나발](/topic/나발), 북, [꽹과리](/topic/꽹과리)를 치면서 제사가 시작함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군고패는 제사를 시작할 때, 제사 중간, 제사가 끝날 때 등 모두 세 번에 걸쳐 풍물을 쳤다. 마을 사람들은 군고패의 풍물 소리를 들으며 제사의 진행 상황을 알게 되었다. 제사가 시작되면 남자 제주가 절을 세 번 하고 술을 올렸다. 이후 제주는 소지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했다. 소지를 올릴 때는 방지소지를 맨 먼저 올렸다. 그런 뒤 할머니, 제주, 이장, 지도자, 장수(長壽)한 자, 중년남자, 소년, 어린이, 복무자(군인, 객지, 타향), 득남, [가축](/topic/가축) 등을 위한 소지를 차례로 올렸다. 제관에 의한 유교식 제사가 끝나고 나면 이 마을 무당이 간단하게 [비손](/topic/비손)을 하며 마을의 안녕과 무탈을 기원했다. 이후에 제주는 [창호지](/topic/창호지)에 메와 민어를 싸서 당산나무 밑에다 묻었다. 그런 다음 짚을 땅에 깔고 밥과 나물 등을 놓아 잡신들에게 [헌식](/topic/헌식)하였다. 중구제를 지낸 이튿날 아침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막걸리를 나눠 들고 풍물을 치며 어울려 놀았다. 제사 비용은 밭 두[마지기](/topic/마지기)의 소출에서 해결하였고 (제주에게는 수고비 명분으로 나락 한 [가마니](/topic/가마니)를 주었다) 나머지 경비는 정월대보름날 [[마당](/topic/마당)밟이](/topic/마당밟이) 때 마을 사람들로부터 걷은 돈을 사용했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다양한 방식으로 중구제를 지내다가 최근에는 매우 간소하게 지내고 있다. 과거처럼 제관도 선정되지 않으며, 지켜야 할 금기도 따로 없다. 소죽마을에는 주로 노인들만 살고 있기 때문에 제물을 마련하거나 풍물을 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래도 제사를 중단할 수 없어서 2006년부터는 동네 절의 스님을 모셔다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물도 스님이 마련해 오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따로 장만하지 않는다. 중구제 하루 전날에는 마을 이장이 마을 공동우물을 퍼내고 금줄을 친다. 구월 초아흐렛날 새벽 4시쯤이 되면 마을 이장, 새마을지도자, 개발위원장, 스님 등 네 명은 당집에 올라간다. 당집 안에 제물을 차려 놓으면 이들이 당집 바깥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제사의 시작을 알리는 풍물을 친다. 현재 풍물은 당집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당집에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 풍물을 치지 않는다. 제사는 30분가량 진행되며, 스님이 목탁을 치면서 불경을 읊는 방식으로 제사를 모신다. 마지막에는 스님이 소지를 올리면서 마을 사람들과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한다. 과거에는 중구제를 마치고 동네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어울려 놀았지만 지금은 스님이 음식을 간단히 챙겨 오기 때문에 나누어 먹는 일은 없다. 이처럼 소죽마을 중구제가 많이 약화되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간단하게라도 이 제의가 지속되길 희망하고 있다. 선조들이 남긴 유산이기도 하고, 제사가 중단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당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참고문헌 | 해남군의 문화유적 (해남군, 1986) [마을](/topic/마을)유래지 (해남군, 1987) 문화유적분포지도-전남 해남군 (해남군, 2002) | 역사 | 소죽[마을](/topic/마을)은 크게 두 구역으로 구분된다. 동남쪽에 본 마을이 있고 남서쪽 야산을 넘어 해안가에 ‘작은 엄남포’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본 마을은 산의 구릉을 따라 있으며, 마을의 북서쪽에서 남쪽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입향조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가 1300년쯤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작은 엄남포에서 소죽리로 들어가는 곳에 ‘혈주재’라는 높은 재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쪽으로 가마나 상여가 지나다니지 못하게 할 정도로 이 혈주재를 매우 신성시하였다. 어떤 [풍수](/topic/풍수) 전문가가 이 마을에 와서는 이 혈주재 때문에 소죽마을에서 큰 인물이 나올 거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혈주재의 한 가운데를 자른 바람에 큰 인물은커녕 마을이 점점 쇠락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일본인들이 혈주재의 혈맥을 잘랐을 때 산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는 전설도 이 마을에서 구전되고 있다. 소죽마을은 지형이 여자의 음부와 같다고 하여 ‘씹동네’ 또는 ‘씹박골’이라고도 불린다. 마을은 음(陰)의 기운이 강한 형국이어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장수한다고 한다. 이에 반해 소죽마을에서 바라다보이는 신흥리 장척마을은 남근을 닮은 지형이다. 옛날에는 장척마을 앞에 남근석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소죽마을 뒷산을 ‘중구날’ 또는 ‘중구산’이라고 한다. 이 산 중턱에는 중구할머니를 모신 당집이 있다. 소죽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중구일(9월 9일)에 이 당집에서 중구할머니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과거에는 지금의 당집 터에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으며, 이 소나무에 중구할머니가 좌정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 아래에 돌을 쌓아 한 평 남짓한 제단을 만들어 제를 지냈으며, 소나무가 썩어서 죽자 1994년에 소나무 터에다 당집을 지어 이곳에 중구할머니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중구할머니가 이 당집에 좌정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집 안에는 중구할머니의 신체(神體)가 따로 없고 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와 징․장구․[꽹과리](/topic/꽹과리) 등 풍물기구만 있을 뿐이다. 전에는 [나발](/topic/나발)도 있었지만 1996년에 당집에 도둑이 들어 분실하였다고 한다. 당집 안에 중구할머니의 신체는 없지만 마을 사람들은 중구할머니가 이곳에 거처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돌보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소죽마을 한복판에는 마을 공동[우물](/topic/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맛도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때에는 물맛이 좋고 수량이 많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자기 마을의 우물에 붓는 ‘샘물대기’를 했다. 이때가 되면 인근 마을 사람들도 소죽마을로 몰려와 우물물을 퍼갔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수량이 많은 곳의 물을 가져가 부으면 그해 우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소죽마을 사람들도 이 마을 공동우물을 매우 신성시하였다. 이 공동우물을 제외한 소죽마을의 다른 곳에서는 우물을 파도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공동우물을 신성시하여 늘 깨끗이 사용했다. 중구제 때에는 이 우물에서 새 물이 솟게 하기 위해 묵은 물을 퍼내고 있다. 우물 근처에는 수령 3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암수 한 쌍의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82년에 면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은행나무 바로 옆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당집을 중심으로 중구산의 양 산줄기가 소죽마을을 감싸안고 있으며, 왼쪽 산줄기가 닿는 곳에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서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이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풍물을 치며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가 마을 공동우물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대 준다고 믿고 이 소나무를 특별히 귀하게 여긴다. 당집에 좌정한 중구할머니가 중구산 끝자락의 소나무 쪽으로 물을 보내면 이 소나무가 우물에 물을 대 준다는 것이다. 중구제가 언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소죽마을에서는 최근까지도 단절하지 않고 매년 음력 구월 초아흐렛날에 중구제를 지내고 있다. 음력 구월 초아흐렛날은 ‘중구절’ 또는 ‘중양절’이라고 한다. 이 날짜는 양수(陽數)의 9가 겹치는 날에 해당된다. 중양절 무렵에는 햇곡식이 나기 때문에 과거에는 명절로 인식하여 일반 가정에서도 추수한 벼로 떡과 메를 지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음기(陰氣)가 센 소죽마을에서는 양(陽)의 수가 겹친 이날을 택하여 중구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소죽마을 사람들은 강한 음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양 기운이 강한 중구날을 택해 중구제를 지내온 것으로 짐작된다. 과거에는 무당, [제관](/topic/제관), 풍물패가 연합하여 중구할머니 제사를 지냈다. 무당은 이 마을에 살던 노시월이라는 점쟁이였다. 송지면 일대에서 이름난 무당인 노시월은 당제 때 제관들과 함께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하는 [비손](/topic/비손)을 해 주었다. 당제 때 마을 대표자로 선발된 제관들은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냈고,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마을 군고패는 풍물을 치며 제사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러나 2005년에 무당이 사망하고 군고패도 사망하거나 노령화되는 바람에 소죽마을의 중구제는 현재 동네에 있는 보경암에서 스님을 모셔다 제를 지내 오고 있다. 소죽마을 주민이 대부분 노인이어서 지금은 과거처럼 풍성하게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한다. 최근에는 중구제 때 마을 이장, 새마을지도자, 개발위원장, 스님 등 모두 네 명만이 참여할 뿐이다. 제물도 스님이 절에서 마련해 오며, 제사도 스님이 혼자 맡아서 불경으로 진행하고 있다. | 역사 | 소죽[마을](/topic/마을)은 크게 두 구역으로 구분된다. 동남쪽에 본 마을이 있고 남서쪽 야산을 넘어 해안가에 ‘작은 엄남포’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본 마을은 산의 구릉을 따라 있으며, 마을의 북서쪽에서 남쪽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입향조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가 1300년쯤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작은 엄남포에서 소죽리로 들어가는 곳에 ‘혈주재’라는 높은 재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쪽으로 가마나 상여가 지나다니지 못하게 할 정도로 이 혈주재를 매우 신성시하였다. 어떤 [풍수](/topic/풍수) 전문가가 이 마을에 와서는 이 혈주재 때문에 소죽마을에서 큰 인물이 나올 거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혈주재의 한 가운데를 자른 바람에 큰 인물은커녕 마을이 점점 쇠락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일본인들이 혈주재의 혈맥을 잘랐을 때 산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는 전설도 이 마을에서 구전되고 있다. 소죽마을은 지형이 여자의 음부와 같다고 하여 ‘씹동네’ 또는 ‘씹박골’이라고도 불린다. 마을은 음(陰)의 기운이 강한 형국이어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장수한다고 한다. 이에 반해 소죽마을에서 바라다보이는 신흥리 장척마을은 남근을 닮은 지형이다. 옛날에는 장척마을 앞에 남근석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소죽마을 뒷산을 ‘중구날’ 또는 ‘중구산’이라고 한다. 이 산 중턱에는 중구할머니를 모신 당집이 있다. 소죽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중구일(9월 9일)에 이 당집에서 중구할머니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과거에는 지금의 당집 터에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으며, 이 소나무에 중구할머니가 좌정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 아래에 돌을 쌓아 한 평 남짓한 제단을 만들어 제를 지냈으며, 소나무가 썩어서 죽자 1994년에 소나무 터에다 당집을 지어 이곳에 중구할머니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중구할머니가 이 당집에 좌정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집 안에는 중구할머니의 신체(神體)가 따로 없고 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와 징․장구․[꽹과리](/topic/꽹과리) 등 풍물기구만 있을 뿐이다. 전에는 [나발](/topic/나발)도 있었지만 1996년에 당집에 도둑이 들어 분실하였다고 한다. 당집 안에 중구할머니의 신체는 없지만 마을 사람들은 중구할머니가 이곳에 거처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돌보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소죽마을 한복판에는 마을 공동[우물](/topic/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맛도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때에는 물맛이 좋고 수량이 많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자기 마을의 우물에 붓는 ‘샘물대기’를 했다. 이때가 되면 인근 마을 사람들도 소죽마을로 몰려와 우물물을 퍼갔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수량이 많은 곳의 물을 가져가 부으면 그해 우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소죽마을 사람들도 이 마을 공동우물을 매우 신성시하였다. 이 공동우물을 제외한 소죽마을의 다른 곳에서는 우물을 파도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공동우물을 신성시하여 늘 깨끗이 사용했다. 중구제 때에는 이 우물에서 새 물이 솟게 하기 위해 묵은 물을 퍼내고 있다. 우물 근처에는 수령 3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암수 한 쌍의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82년에 면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은행나무 바로 옆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당집을 중심으로 중구산의 양 산줄기가 소죽마을을 감싸안고 있으며, 왼쪽 산줄기가 닿는 곳에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서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이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풍물을 치며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가 마을 공동우물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대 준다고 믿고 이 소나무를 특별히 귀하게 여긴다. 당집에 좌정한 중구할머니가 중구산 끝자락의 소나무 쪽으로 물을 보내면 이 소나무가 우물에 물을 대 준다는 것이다. 중구제가 언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소죽마을에서는 최근까지도 단절하지 않고 매년 음력 구월 초아흐렛날에 중구제를 지내고 있다. 음력 구월 초아흐렛날은 ‘중구절’ 또는 ‘중양절’이라고 한다. 이 날짜는 양수(陽數)의 9가 겹치는 날에 해당된다. 중양절 무렵에는 햇곡식이 나기 때문에 과거에는 명절로 인식하여 일반 가정에서도 추수한 벼로 떡과 메를 지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음기(陰氣)가 센 소죽마을에서는 양(陽)의 수가 겹친 이날을 택하여 중구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소죽마을 사람들은 강한 음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양 기운이 강한 중구날을 택해 중구제를 지내온 것으로 짐작된다. 과거에는 무당, [제관](/topic/제관), 풍물패가 연합하여 중구할머니 제사를 지냈다. 무당은 이 마을에 살던 노시월이라는 점쟁이였다. 송지면 일대에서 이름난 무당인 노시월은 당제 때 제관들과 함께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하는 [비손](/topic/비손)을 해 주었다. 당제 때 마을 대표자로 선발된 제관들은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냈고,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마을 군고패는 풍물을 치며 제사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러나 2005년에 무당이 사망하고 군고패도 사망하거나 노령화되는 바람에 소죽마을의 중구제는 현재 동네에 있는 보경암에서 스님을 모셔다 제를 지내 오고 있다. 소죽마을 주민이 대부분 노인이어서 지금은 과거처럼 풍성하게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한다. 최근에는 중구제 때 마을 이장, 새마을지도자, 개발위원장, 스님 등 모두 네 명만이 참여할 뿐이다. 제물도 스님이 절에서 마련해 오며, 제사도 스님이 혼자 맡아서 불경으로 진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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