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영동거북산당

한국무속신앙사전
경기도 수원시 영동시장 상인들의 공동체 신앙처로 거북산신 또는 거북도당신을 모신 당. 거북도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영동 43-2[번지](/topic/번지)에 위치하며, 1986년 4월 8일에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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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수원시 영동시장 상인들의 공동체 신앙처로 거북산신 또는 거북도당신을 모신 당. 거북도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영동 43-2[번지](/topic/번지)에 위치하며, 1986년 4월 8일에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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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경
정의경기도 수원시 영동시장 상인들의 공동체 신앙처로 거북산신 또는 거북도당신을 모신 당. 거북도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영동 43-2[번지](/topic/번지)에 위치하며, 1986년 4월 8일에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정의경기도 수원시 영동시장 상인들의 공동체 신앙처로 거북산신 또는 거북도당신을 모신 당. 거북도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영동 43-2[번지](/topic/번지)에 위치하며, 1986년 4월 8일에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정면 세 칸의 당집 내부는 전면 벽 중앙에 두 개의 탱화가 걸려 있다. 왼쪽이 대왕님, 오른쪽이 거북도당할아버지·할머니 내외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전면과 오른쪽 면에 1m 높이의 제단이 빙 둘러 놓여 있다. 제단 그 위에는 [향합](/topic/향합)과 공양물, 여러 신의 [위패](/topic/위패)들이 놓여 있다. 대왕님 신은 ‘대왕님’이라고 탱화 하단 왼쪽에 가로로 써 있으며 그왼쪽 옆에 세로로 ‘염라’ 두 글자가 덧붙여져 있다. 제단에 놓여 있는 옛 당주였던 백씨 만신의 사진(1970년대 초반으로 추정됨)속 탱화에는 이 ‘염라’ 부분이 없기 때문에 이는 그 이후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1986년에 세워진 안내판에도 이를 바탕으로 한 염라대왕이라는 설명이 나와 있다. 탱화가 끝난 오른쪽 한 칸에는 동자신(童子神)을 모시는 단이 있다. 이 단에는 특별한 위패 없이 과자봉지가 쌓여 있고, 그 오른쪽으로 [정화수](/topic/정화수)와 쌀을 담은 주발을 얹은 상이 놓여 있다. 탱화의 왼쪽으로는 당 건립 기념 액자가 벽에 걸려 있고, 그 가장자리엔 작은 종을 매단 종 틀이 서 있다.

당의 오른쪽 측면에는 왼쪽부터 사해용왕님전, [옥황상제](/topic/옥황상제)님전, 북두칠성님전, 삼불제석님전, 열두대신할머니전, 산신대감님전, 일곱칠성님전이라 쓰인 모두 7위의 무속신을 모신 위패용 액자 세 개가 있다. 이들 액자 오른쪽에 태극기 액자가 세워져 있고, 이전 당주였던 백씨 만신의 사진과 함께 염주가 둘러진 [한지](/topic/한지)[고깔](/topic/고깔)이 놓여 있다. 당의 왼쪽 측면에는 종 쪽으로 군웅단지라 하여 쌀을 담던 큰 독이 있다. 현재는 돈이 들어 있다. 그리고 당집 문 바로 맞은편으로 이웃 건물 벽에 붙여서 15㎝ 높이로 쌓아 올린 장방형시멘트 단이 있다. 수원의 [진산](/topic/진산)인 팔달산신을 모신 것이다. 단 한가운데에 정수를 담은 그릇이 놓여 있다. 옛 연못 자리에는 시멘트로 높게 쌓아 올린 [우물](/topic/우물)이 있고, 그 바로옆 북쪽으로 중간 크기의 은행나무 아래 서낭을 모신 단이 만들어져 있다. 단은 벽돌을 몇 개 괸 양쪽 받침 위에 화강암 판석이 여러 개 겹쳐져 있고, 그 위에 작은 동자승 [인형](/topic/인형)과 1990년대 중반에 당주가 직접 깎은 용 모양(실제로는 뱀처럼 보임)의 머리를 한 소나무 막대기 한 개가 세워져 있다. 단 주위에는 여러 크기의 작은 바위 돌이 몇 개흩어져 있다.

현재 당의 제단 구성은 일반적 무속 신당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경기도 [마을](/topic/마을) 제당과 일정 정도 차이가 있다. 이런 상황은 최초 당집 건립의 주체인 백윤남 만신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백윤남의 입무(入巫) 내력을 보면, 갑자기 신이 내려 화성 팔달문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거북산신이 내렸다고 하면서 그 길로 거북산당에 가 치성을 드린 뒤이 당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그래서인지 옛 당집 사진을 보면 [제상](/topic/제상)(祭床) 양쪽에 태극기가 꽂혀 있다. 지금도 당집 안 벽에는 태극기를 넣은 액자가 걸려 있다. 그녀가 당집을 지으면서 비로소 도당할아버지·할머니와 대왕님의 탱화가 걸리게 되었고, 다양한 무속신이 함께 모셔[지게](/topic/지게) 되었다. 신들은 어떤 계기를 통해 새롭게 당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위패가 놓인 위치나 모셔진 신의 종류는 항상 달라질 수 있다.

거북산당 관련 제의에는 크게 당고사 또는 당굿과 도당굿이 있다. 대개는 당고사로 불리는 소규모 제의가 치러지고, 제비가 넉넉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도당굿을 거행하였다. 당고사는 음력 시월 초이렛날에 치러지며, 도당할머니로 불리는 당주 임복례가 시장번영회의 도움과 관심 있는 사람들의 추렴을 통해 고사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인근에서 참여하는 만신들이 핵심 제물인 쇠머리를 준비해 오는 경우가 많다. 먼저 당고사나 도당굿을 거행하기 하루 전날 밤에 당주굿이라 하여 당주 또는 주무의 집에서 떡시루를 쪄서 자신이 위하고 있는 신들에게 미리 올린다. 당일 고사상에 쇠머리나 돼지머리, 떡시루, 과일 등 제물을 차려 놓고 아침부터 굿을 한다. 당굿은 만신의 청신과 치성 후 시장 상인들의 개별 치성으로 이어진다. 치성할 손님이 오는 대로 제를 올려 축원해 주기 때문에 굿이 끝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치성을 올리는 과정은 당고사 때나 보통 때의 개별 치성이 모두 같지만 당굿을 하는 만신이 있을 때에 는 공수도 내려준다. 치성을 올리는 사람이 오면 먼저 도당할머니[당주]가 당의 왼쪽에 마주 놓여 있는 북과 종을 친다. 다음으로 신단에 치성자가 가져온 초를 놓고 불을 밝힌 다음 향을 사른다. 치성자의 제물은 원래 떡시루를 해 가져오지만 근래에 와서는 지폐를 제단에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제차(祭次)는 대왕님을 모신 다음 도당할아버지·할머니, 오른쪽의 [칠성신](/topic/칠성신)을 비롯한 무속신을 모신 뒤 군웅에 상을 놓는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 팔달산과 광교산신을 청하여 [마당](/topic/마당)에 있는 단에 상을 차려 놓고, 마지막으로 서낭에 손을 비비며 기원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편, 당주는당고사 외에도 반드시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제를 올린다. 특히 초하룻날에는 반드시 제를 올려야 한다. 이밖에 가끔 당에 공을 드리는 만신들이 찾아와 기원을 하기도 한다.

거북산당은 수원에서 큰 당에 속했으며, 제의 역시 경기가 좋을 때는 경기도 무속 의례의 전형인 도당굿을 거행하였다. [경기도도당굿](/topic/경기도도당굿) 굿판은 세습무인 화랭이[남무(男巫)]와미지[여무(女巫)]가 이끌어 왔다. 거북산당 도당굿의 주무는 오랫동안 경기도 오산 출신의 화랭이 이용우 집안과 [단골](/topic/단골)관계에 있었다. 이용우 사후인 1990년에 경기도도당굿이‘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될 때 그의 제자인 [오수복](/topic/오수복)이 기능보[유자](/topic/유자)가 되었고, 오수복에 의해 매년 한 차례 날을 잡아 굿이 행해지고 있다. 최근 경제적 어려움과 시장상인들의 관심 부족으로 도당굿은 공동체신앙 의례로서보다는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의 연례적 의무로 연행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거북산당의 영험은 “도당굿을 하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난다”고 하는 말로 대표된다. 도당굿을 중단한 동안 별다른 이유 없이 시장 사람들이 한 해에 서너 명이나 죽어 나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상없어도 제를 올려야 한다고 당주나 당을 믿는 사람들은 말한다. 실제 자금이 없어 큰 굿을 못한 몇 년 동안 시장에 불이 나고 사람이 죽는 등 문제가 생기자 1994년부터 시장번영회 쪽에서 제수를 차려 와서 치성을 드려 액을 막은 적도 있다. 이런 [일화](/topic/일화)는 거북산당이 [도당신](/topic/도당신)과 산신으로서의 일반적인 마을신의 성격뿐만 아니라 예부터 거북, 연못, 하천 등 물과의 친연성으로 인한 수신적(水神的) 속성 또는 [풍수](/topic/풍수)적 신앙의 전통과도 결합되어 있는 복합적 신앙 현상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참고문헌국역 화성성역의궤 (수원시, 1977)
수원시사 (수원시, 1997)
경기도의 굿 (하주성, 경기문화재단, 1999)
경기도 도당굿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수원 영동 거북산당 신앙의 변화 (안혜경, 실천민속학연구 3, 실천민속학회, 2001)
경기도의 [마을](/topic/마을)신앙과 제당 (김지욱,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2)
내용정면 세 칸의 당집 내부는 전면 벽 중앙에 두 개의 탱화가 걸려 있다. 왼쪽이 대왕님, 오른쪽이 거북도당할아버지·할머니 내외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전면과 오른쪽 면에 1m 높이의 제단이 빙 둘러 놓여 있다. 제단 그 위에는 [향합](/topic/향합)과 공양물, 여러 신의 [위패](/topic/위패)들이 놓여 있다. 대왕님 신은 ‘대왕님’이라고 탱화 하단 왼쪽에 가로로 써 있으며 그왼쪽 옆에 세로로 ‘염라’ 두 글자가 덧붙여져 있다. 제단에 놓여 있는 옛 당주였던 백씨 만신의 사진(1970년대 초반으로 추정됨)속 탱화에는 이 ‘염라’ 부분이 없기 때문에 이는 그 이후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1986년에 세워진 안내판에도 이를 바탕으로 한 염라대왕이라는 설명이 나와 있다. 탱화가 끝난 오른쪽 한 칸에는 동자신(童子神)을 모시는 단이 있다. 이 단에는 특별한 위패 없이 과자봉지가 쌓여 있고, 그 오른쪽으로 [정화수](/topic/정화수)와 쌀을 담은 주발을 얹은 상이 놓여 있다. 탱화의 왼쪽으로는 당 건립 기념 액자가 벽에 걸려 있고, 그 가장자리엔 작은 종을 매단 종 틀이 서 있다.

당의 오른쪽 측면에는 왼쪽부터 사해용왕님전, [옥황상제](/topic/옥황상제)님전, 북두칠성님전, 삼불제석님전, 열두대신할머니전, 산신대감님전, 일곱칠성님전이라 쓰인 모두 7위의 무속신을 모신 위패용 액자 세 개가 있다. 이들 액자 오른쪽에 태극기 액자가 세워져 있고, 이전 당주였던 백씨 만신의 사진과 함께 염주가 둘러진 [한지](/topic/한지)[고깔](/topic/고깔)이 놓여 있다. 당의 왼쪽 측면에는 종 쪽으로 군웅단지라 하여 쌀을 담던 큰 독이 있다. 현재는 돈이 들어 있다. 그리고 당집 문 바로 맞은편으로 이웃 건물 벽에 붙여서 15㎝ 높이로 쌓아 올린 장방형시멘트 단이 있다. 수원의 [진산](/topic/진산)인 팔달산신을 모신 것이다. 단 한가운데에 정수를 담은 그릇이 놓여 있다. 옛 연못 자리에는 시멘트로 높게 쌓아 올린 [우물](/topic/우물)이 있고, 그 바로옆 북쪽으로 중간 크기의 은행나무 아래 서낭을 모신 단이 만들어져 있다. 단은 벽돌을 몇 개 괸 양쪽 받침 위에 화강암 판석이 여러 개 겹쳐져 있고, 그 위에 작은 동자승 [인형](/topic/인형)과 1990년대 중반에 당주가 직접 깎은 용 모양(실제로는 뱀처럼 보임)의 머리를 한 소나무 막대기 한 개가 세워져 있다. 단 주위에는 여러 크기의 작은 바위 돌이 몇 개흩어져 있다.

현재 당의 제단 구성은 일반적 무속 신당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경기도 [마을](/topic/마을) 제당과 일정 정도 차이가 있다. 이런 상황은 최초 당집 건립의 주체인 백윤남 만신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백윤남의 입무(入巫) 내력을 보면, 갑자기 신이 내려 화성 팔달문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거북산신이 내렸다고 하면서 그 길로 거북산당에 가 치성을 드린 뒤이 당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그래서인지 옛 당집 사진을 보면 [제상](/topic/제상)(祭床) 양쪽에 태극기가 꽂혀 있다. 지금도 당집 안 벽에는 태극기를 넣은 액자가 걸려 있다. 그녀가 당집을 지으면서 비로소 도당할아버지·할머니와 대왕님의 탱화가 걸리게 되었고, 다양한 무속신이 함께 모셔[지게](/topic/지게) 되었다. 신들은 어떤 계기를 통해 새롭게 당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위패가 놓인 위치나 모셔진 신의 종류는 항상 달라질 수 있다.

거북산당 관련 제의에는 크게 당고사 또는 당굿과 도당굿이 있다. 대개는 당고사로 불리는 소규모 제의가 치러지고, 제비가 넉넉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도당굿을 거행하였다. 당고사는 음력 시월 초이렛날에 치러지며, 도당할머니로 불리는 당주 임복례가 시장번영회의 도움과 관심 있는 사람들의 추렴을 통해 고사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인근에서 참여하는 만신들이 핵심 제물인 쇠머리를 준비해 오는 경우가 많다. 먼저 당고사나 도당굿을 거행하기 하루 전날 밤에 당주굿이라 하여 당주 또는 주무의 집에서 떡시루를 쪄서 자신이 위하고 있는 신들에게 미리 올린다. 당일 고사상에 쇠머리나 돼지머리, 떡시루, 과일 등 제물을 차려 놓고 아침부터 굿을 한다. 당굿은 만신의 청신과 치성 후 시장 상인들의 개별 치성으로 이어진다. 치성할 손님이 오는 대로 제를 올려 축원해 주기 때문에 굿이 끝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치성을 올리는 과정은 당고사 때나 보통 때의 개별 치성이 모두 같지만 당굿을 하는 만신이 있을 때에 는 공수도 내려준다. 치성을 올리는 사람이 오면 먼저 도당할머니[당주]가 당의 왼쪽에 마주 놓여 있는 북과 종을 친다. 다음으로 신단에 치성자가 가져온 초를 놓고 불을 밝힌 다음 향을 사른다. 치성자의 제물은 원래 떡시루를 해 가져오지만 근래에 와서는 지폐를 제단에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제차(祭次)는 대왕님을 모신 다음 도당할아버지·할머니, 오른쪽의 [칠성신](/topic/칠성신)을 비롯한 무속신을 모신 뒤 군웅에 상을 놓는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 팔달산과 광교산신을 청하여 [마당](/topic/마당)에 있는 단에 상을 차려 놓고, 마지막으로 서낭에 손을 비비며 기원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편, 당주는당고사 외에도 반드시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제를 올린다. 특히 초하룻날에는 반드시 제를 올려야 한다. 이밖에 가끔 당에 공을 드리는 만신들이 찾아와 기원을 하기도 한다.

거북산당은 수원에서 큰 당에 속했으며, 제의 역시 경기가 좋을 때는 경기도 무속 의례의 전형인 도당굿을 거행하였다. [경기도도당굿](/topic/경기도도당굿) 굿판은 세습무인 화랭이[남무(男巫)]와미지[여무(女巫)]가 이끌어 왔다. 거북산당 도당굿의 주무는 오랫동안 경기도 오산 출신의 화랭이 이용우 집안과 [단골](/topic/단골)관계에 있었다. 이용우 사후인 1990년에 경기도도당굿이‘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될 때 그의 제자인 [오수복](/topic/오수복)이 기능보[유자](/topic/유자)가 되었고, 오수복에 의해 매년 한 차례 날을 잡아 굿이 행해지고 있다. 최근 경제적 어려움과 시장상인들의 관심 부족으로 도당굿은 공동체신앙 의례로서보다는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의 연례적 의무로 연행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거북산당의 영험은 “도당굿을 하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난다”고 하는 말로 대표된다. 도당굿을 중단한 동안 별다른 이유 없이 시장 사람들이 한 해에 서너 명이나 죽어 나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상없어도 제를 올려야 한다고 당주나 당을 믿는 사람들은 말한다. 실제 자금이 없어 큰 굿을 못한 몇 년 동안 시장에 불이 나고 사람이 죽는 등 문제가 생기자 1994년부터 시장번영회 쪽에서 제수를 차려 와서 치성을 드려 액을 막은 적도 있다. 이런 [일화](/topic/일화)는 거북산당이 [도당신](/topic/도당신)과 산신으로서의 일반적인 마을신의 성격뿐만 아니라 예부터 거북, 연못, 하천 등 물과의 친연성으로 인한 수신적(水神的) 속성 또는 [풍수](/topic/풍수)적 신앙의 전통과도 결합되어 있는 복합적 신앙 현상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참고문헌국역 화성성역의궤 (수원시, 1977)
수원시사 (수원시, 1997)
경기도의 굿 (하주성, 경기문화재단, 1999)
경기도 도당굿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수원 영동 거북산당 신앙의 변화 (안혜경, 실천민속학연구 3, 실천민속학회, 2001)
경기도의 [마을](/topic/마을)신앙과 제당 (김지욱, 전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2002)
역사거북산당의 역사는 크게 두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당집과 관련해서는 시대에 따라 형태 변화를 보인다. 당이 위치한 곳은 도시화 과정을 겪으면서 현재 약간의 오르막 정도로 여겨지는 도로가 생겼지만, 원래 거북산이라 불리는 동산이었다. 화성이 축조되던 당시부터 거북처럼 생겨 신성하게 여기던‘[거북바위](/topic/거북바위)[구암(龜巖)]’라는 큰 바위가 있었고, 그 곁에 제법 큰 연못이 있었다. 당집에 비견될 만한 것이 [마을](/topic/마을) 형성 초창기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20년대에는 이미 인공물로서 신당(神堂)이 거북바위 옆에 세워졌다. 우묵하게 파인 땅에 짚으로 [터줏가리](/topic/터줏가리) 형태의 [움집](/topic/움집)이 있었다. 그 안에는 도당할아버지를 상징하는 흰색 기(旗)를 넣어 두었다. 움집 바깥쪽 중간 부분을 줄로 둘러매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가져온 소지 종이들을 끼워 두었다. 제물로 가져 온 [시루떡](/topic/시루떡)을 조금 떼어 움집 안에 넣어 두고 그 앞에서 제의를 행하였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당집이 세워진 것은 1964년이다. 골[기와](/topic/기와)를 얹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의 전통 건축물로 당집을 세운 것은 [경기도도당굿](/topic/경기도도당굿) 무녀인 백윤남 만신이다. 당집 내부 벽에 걸려있는 건립 기념 액자에는 건립 유공자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녀 외에도 남편인 이성덕과 나머지 기부자 여섯 명의 이름 및 기부금 액수가 나와 있다. 1986년에 거북산당이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면서 [단청](/topic/단청)을 새로 칠하고 보호를 위해 울타리를 둘렀다. 수원천이 복개되던 1994년에 수원시의 지원으로 다시 한 번 당을 수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못이 메워지고 그 자리에 시멘트를 둥글게 쌓아 올린 [우물](/topic/우물)을 만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거북바위는 당주 임복례(1922년생)가 공사 기간에 한동안 당을 비운 사이 누군가 가져감으로써 없어졌다.

다음으로 공동체 신앙처로서 거북산당의 역사에 관해서는 장터 마을이던 당시 구천동의 사회·경제적 변화 과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영동이라는 지명은 1931년 일본식 정(町)과 정목(丁目)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구천동에 속하였다. 화성(華城) 축조로 확대 정착된 구천동 부근 지역은 당시부터 이미 성 밖 시장으로서 장터 마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00년대 전반기만 해도 매년 정초에는 성안시장 주민들과 편을 나눠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성행할 정도로 구천동은 장터 마을로서의 지연적(地緣的)인 생활공동체였다. 다시 말해 이 시기까지는 구천동의 주민 다수가 시장의 상가 주인이거나 시장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관련 제의로 당고사는물론 도당굿 경비도 이들을 중심으로 갹출되었고, 축원 내용도 자연스레 시장의 번영에 맞춰졌다.

광복 이후 도시의 팽창과 인구 집중 및 이동에 따라 장터 마을로서의 지연성은 서서히 해체된 반면에 1972년 시장 설치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영동시장은 영동시장주식회사라는 법인체가 되었다. 이와 함께 시장상가 업주들로 구성된 시장번영회라는 단체가 구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해체된 마을을 대신해 시장번영회가 거북산당 제의의중심에 서게 되었다.
역사거북산당의 역사는 크게 두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당집과 관련해서는 시대에 따라 형태 변화를 보인다. 당이 위치한 곳은 도시화 과정을 겪으면서 현재 약간의 오르막 정도로 여겨지는 도로가 생겼지만, 원래 거북산이라 불리는 동산이었다. 화성이 축조되던 당시부터 거북처럼 생겨 신성하게 여기던‘[거북바위](/topic/거북바위)[구암(龜巖)]’라는 큰 바위가 있었고, 그 곁에 제법 큰 연못이 있었다. 당집에 비견될 만한 것이 [마을](/topic/마을) 형성 초창기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20년대에는 이미 인공물로서 신당(神堂)이 거북바위 옆에 세워졌다. 우묵하게 파인 땅에 짚으로 [터줏가리](/topic/터줏가리) 형태의 [움집](/topic/움집)이 있었다. 그 안에는 도당할아버지를 상징하는 흰색 기(旗)를 넣어 두었다. 움집 바깥쪽 중간 부분을 줄로 둘러매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가져온 소지 종이들을 끼워 두었다. 제물로 가져 온 [시루떡](/topic/시루떡)을 조금 떼어 움집 안에 넣어 두고 그 앞에서 제의를 행하였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당집이 세워진 것은 1964년이다. 골[기와](/topic/기와)를 얹은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의 전통 건축물로 당집을 세운 것은 [경기도도당굿](/topic/경기도도당굿) 무녀인 백윤남 만신이다. 당집 내부 벽에 걸려있는 건립 기념 액자에는 건립 유공자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녀 외에도 남편인 이성덕과 나머지 기부자 여섯 명의 이름 및 기부금 액수가 나와 있다. 1986년에 거북산당이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면서 [단청](/topic/단청)을 새로 칠하고 보호를 위해 울타리를 둘렀다. 수원천이 복개되던 1994년에 수원시의 지원으로 다시 한 번 당을 수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못이 메워지고 그 자리에 시멘트를 둥글게 쌓아 올린 [우물](/topic/우물)을 만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거북바위는 당주 임복례(1922년생)가 공사 기간에 한동안 당을 비운 사이 누군가 가져감으로써 없어졌다.

다음으로 공동체 신앙처로서 거북산당의 역사에 관해서는 장터 마을이던 당시 구천동의 사회·경제적 변화 과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영동이라는 지명은 1931년 일본식 정(町)과 정목(丁目)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구천동에 속하였다. 화성(華城) 축조로 확대 정착된 구천동 부근 지역은 당시부터 이미 성 밖 시장으로서 장터 마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00년대 전반기만 해도 매년 정초에는 성안시장 주민들과 편을 나눠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가 성행할 정도로 구천동은 장터 마을로서의 지연적(地緣的)인 생활공동체였다. 다시 말해 이 시기까지는 구천동의 주민 다수가 시장의 상가 주인이거나 시장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관련 제의로 당고사는물론 도당굿 경비도 이들을 중심으로 갹출되었고, 축원 내용도 자연스레 시장의 번영에 맞춰졌다.

광복 이후 도시의 팽창과 인구 집중 및 이동에 따라 장터 마을로서의 지연성은 서서히 해체된 반면에 1972년 시장 설치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영동시장은 영동시장주식회사라는 법인체가 되었다. 이와 함께 시장상가 업주들로 구성된 시장번영회라는 단체가 구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해체된 마을을 대신해 시장번영회가 거북산당 제의의중심에 서게 되었다.
형태당 건물의 규모는 정면 4.9m, 측면 2.5m 정도이다.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크기의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에 골[기와](/topic/기와)를 얹은 동북향의 집이다. 전통적 사우(祠宇)와 마찬[가지](/topic/가지)로 [단청](/topic/단청)을 입혔다. 1986년 수원시의 지원으로 당을 수리할 때 측면 도로에 접한 경계에 ‘만(卍)’ 자 형쇠 울타리로 된 [담장](/topic/담장)을 설치하고 그 앞에 안내 입간판도 세워 두었다. 수원천이 복개되던 1994년 당 수리공사 때 건물 앞[마당](/topic/마당)과 맞닿은 인근 건물이 잠식해 들어왔고, 건물 뒷면과 왼쪽 면으로도 높은 건물이 바싹 붙어 건립되면서 당집 마당은 더욱 협소해지고 위축된 모양새를 지니게 되었다.
형태당 건물의 규모는 정면 4.9m, 측면 2.5m 정도이다.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크기의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에 골[기와](/topic/기와)를 얹은 동북향의 집이다. 전통적 사우(祠宇)와 마찬[가지](/topic/가지)로 [단청](/topic/단청)을 입혔다. 1986년 수원시의 지원으로 당을 수리할 때 측면 도로에 접한 경계에 ‘만(卍)’ 자 형쇠 울타리로 된 [담장](/topic/담장)을 설치하고 그 앞에 안내 입간판도 세워 두었다. 수원천이 복개되던 1994년 당 수리공사 때 건물 앞[마당](/topic/마당)과 맞닿은 인근 건물이 잠식해 들어왔고, 건물 뒷면과 왼쪽 면으로도 높은 건물이 바싹 붙어 건립되면서 당집 마당은 더욱 협소해지고 위축된 모양새를 지니게 되었다.
민족문화사한국민속대사전 2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1991
화산문화진도씻김굿황루시2001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진도씻김굿의 상징적 특성에 관한 연구-지전춤을 중심으로서희경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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