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수동복개당화분

한국무속신앙사전
서울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福介堂)에 모셔졌던 화분. 복개당은 철거되었으며 복개당 화분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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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福介堂)에 모셔졌던 화분. 복개당은 철거되었으며 복개당 화분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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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
정의서울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福介堂)에 모셔졌던 화분. 복개당은 철거되었으며 복개당 화분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역사 및 유래서울 마포의 복개당은 1977년부터 1978년 사이 도시화 물결 속에서 사라진 지역의 [마을](/topic/마을)당이다.당 옆으로 찻길이 뚫리게 되어 주변 건축물들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복개당은 허물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개당에 대한 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국가 정책도 전통문화 전승이나 문화재 보호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국토 개발과 산업화에 치중하였다. 미신에 대한 사회적 적대와 문화재 보호에 대한 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복개당은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복개당은 전형적인 신당 건물이었다. 목조[기와](/topic/기와)로된 일자형 신당이었는데 중앙과 좌우를 구분 짓는 [기둥](/topic/기둥) 4개가 신당 안쪽 중앙에 앞뒤좌우로 [대들보](/topic/대들보)를 받치고 세워져 있었다.신당에는 [현판](/topic/현판)과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던 중수기가 걸려 있었다. 해체된 건물 자재들은 하나하나 일련번호를 적어 묶음으로 정돈된 후 에밀레박물관 건립자 및 관장이었던 고 조자용에 의해 화곡동의 에밀레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83년 에밀레박물관이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topic/속리산) 입구로 옮겨가게 되자 자재들도 함께 그곳으로 옮겨졌다. 조자용은 허물어져 가는 옛 건축물들을 해체하여 옮겨와 다시 조립하였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복개당 대들보 중앙 부분에 구멍을 파고 넣어 두었던 은 조각품 부적이 발견되었다. 육각형 여섯 귀퉁이에 ‘수(水)’자 여섯 개를 둘러 새겨서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육각형 조각품 다섯 개가 동, 서, 남, 북, 중앙을 뜻하는 다섯 방향으로 서로 뭉쳐 있었다. 이것은 화재를 막는 부적으로서 많은 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묘(淼)부적으로 주로 궁궐이나 지위가 높은 건축물에서 쓰인다. 그러나 그러한 자료 가치를 제대로 규명할 겨를도 없이 건물 자재들은 이리 저리 흩어져 조립될 수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복개당의 존재 및 역사적 유래에 대한 자료는 무라야마 지준이 1937년에서 보고한 『[부락제](/topic/부락제)(部落祭)』가 전부일 정도이다. 이 자료에 보면, 당시로부터 약150년 전에 손복개(孫福介)라고 하는 마을민이 선몽으로 세조대왕을 마을의 주신으로 모시면서 당을 짓게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무라야마 지준이 밝힌 조사내용은 1920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토대로 보면 복개당은 1770년쯤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에 복개당에 대한 언급이 나와 눈길을 끈다. 이 자료는 1639년(인조 17)에 기록된 것인데 그 내용은, “……복개당(福介堂) 무녀(巫女)의 어미인 무인(戊寅)을 먼저 수금(囚禁)하겠다”는 의금부(義禁府)의 계 등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인조실록」에서도 복개당에 관한 기록이 보여 흥미롭다. 의금부가 무녀들이 행한 저주에 대한 것을 심문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복개당(福介堂) 무녀(巫女) 운……”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 와 『조선왕조실록』 두 기록에 보이는 복개당은동일한 당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건 발생연도도 동일하다. 복개당이 마포 신수동에 있었다는 것은 본 사건 기록에서‘무녀 천금(賤今)이 공덕리(孔德里) 조춘금(趙春金)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을 도사(都事)가 붙잡으러 가자, 춘금의 아내가 용산(龍山)에 가 있다고 속였는데……운운’ 등의 지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공덕리와 용산은모두 마포 일대의 지역으로서 신수동복개당과 인접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은 두 자료의 기록으로 보아서 분명 복개당은 1639년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복개당의 주신으로 모셔진 세조대왕(世祖大王)은 1417년에 태어나서 1468년에 사망한 조선 제7대 왕이다. 무속신앙에서 역사적 인물이 신으로 등극되는 것은 사후의 일이기 때문에 세조대왕이 무속신앙의 신격으로 봉신되기 위해서는 1468년 이후여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아 복개당은 빠르게는 1468년에 지어진 것이고 늦게는 1639년에 건립되어졌을 것이라는 답에 다다르게 된다. 이는 무라야마 지준이 밝힌 것 보다는 131년에서 302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복개당 현판에서 ‘복개(福介)’라는 명칭이 마을 사람 손복개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무라야마 지준의 자료는 일찍이 수긍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복개당에 관한 여타의 서술들은 모두 무라야마 지준이 밝힌 마을민 손복개 이름과 연관지어 설명되어 왔다. 이를 테면 “마을민 손복개가 어느 날 꿈에서 노인을 만났는데, 마을 인근 괴목 위에 걸린 세조대왕 [영정](/topic/영정)을 찾아다 마을에 당을 지어 [봉안](/topic/봉안)하고 매년 봄, 여름, 가을 세 차례 제를 지내게 되면 자신의 집은 물론 마을 모두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 하였고, 그 후 사람들은 마을에 당을 짓고 그 명칭을 꿈에 계시 받은 손복개 이름을 따서 복개당라고 불렀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과오는 그동안 무라야마 지준 자료에 대한 검증이나 이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나라 마을당과 관련된 어원 탐구는 일찍이 조지훈의 ‘累石壇, 神樹, 堂집 신앙 연구’에서 행해졌다. 조지훈은 고대 민간신앙의 뿌리는 오늘날까지 전국적으로 광범위한분포를 보이고 있는 돌무더기[石壇], 신목[神樹], 당집(堂집) 형태로 된 신앙 공간이라고 규정하고, 석단과 신목 형태는 혼합되어 전승된 애초 형태의 신앙처지만 당집은 후기에 발달한 것이라고 하였다. 신앙 대상으로 삼고 있는 천신, 산신, 부락신의 세 [가지](/topic/가지) 요소는 각각 동등한 지위에서 삼위일체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이는 우리 한민족 신앙의 원형적 모태가 되는 의 환인, 환웅, 단군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시공 변화에 따라 오늘날 수많은 형태와 갈래를 보이고 있는 마을신앙은 천신계, 산신계, 신계, 성황계, 계 등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서울 마포의 복개당은 神계에 속하는 것으로 이는 천신신앙인 ‘신’이 전화(轉化)되어 부락신이 된 것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통용되는 ‘밝다’의 ‘밝’은 원래 ‘’에서 나온 것으로 그 뜻은 ‘신(神)’, ‘하늘[天]’, ‘해[日]’이다. 조지훈은 ‘’은 곧 ‘백(白), 광명(光明),태양(太陽)’을 위하는 이른바 하늘숭배에서 온 것이라고 하고, 이것이 ‘불[火]’, ‘들[野]’, ‘국토(國土)’의 뜻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형어 ‘’에서 전해진神에서의 “”은 옛 지명의 ‘伐’, ‘弗’, ‘發’, ‘火’, ‘原’,‘坪’, ‘平’, ‘林’, ‘沙’, ‘國’ 등으로 기사(記寫)되었는데 이를 한편으로는 ‘白’, ‘朴’, ‘碧’, ‘卜’, ‘伏’, ‘福’으로도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전개에 따라 복개당은 결국 ‘’의 ㄱ받침계의 신명(神名)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정의서울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福介堂)에 모셔졌던 화분. 복개당은 철거되었으며 복개당 화분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역사 및 유래서울 마포의 복개당은 1977년부터 1978년 사이 도시화 물결 속에서 사라진 지역의 [마을](/topic/마을)당이다.당 옆으로 찻길이 뚫리게 되어 주변 건축물들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복개당은 허물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개당에 대한 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국가 정책도 전통문화 전승이나 문화재 보호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국토 개발과 산업화에 치중하였다. 미신에 대한 사회적 적대와 문화재 보호에 대한 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복개당은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복개당은 전형적인 신당 건물이었다. 목조[기와](/topic/기와)로된 일자형 신당이었는데 중앙과 좌우를 구분 짓는 [기둥](/topic/기둥) 4개가 신당 안쪽 중앙에 앞뒤좌우로 [대들보](/topic/대들보)를 받치고 세워져 있었다.신당에는 [현판](/topic/현판)과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던 중수기가 걸려 있었다. 해체된 건물 자재들은 하나하나 일련번호를 적어 묶음으로 정돈된 후 에밀레박물관 건립자 및 관장이었던 고 조자용에 의해 화곡동의 에밀레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83년 에밀레박물관이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topic/속리산) 입구로 옮겨가게 되자 자재들도 함께 그곳으로 옮겨졌다. 조자용은 허물어져 가는 옛 건축물들을 해체하여 옮겨와 다시 조립하였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복개당 대들보 중앙 부분에 구멍을 파고 넣어 두었던 은 조각품 부적이 발견되었다. 육각형 여섯 귀퉁이에 ‘수(水)’자 여섯 개를 둘러 새겨서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육각형 조각품 다섯 개가 동, 서, 남, 북, 중앙을 뜻하는 다섯 방향으로 서로 뭉쳐 있었다. 이것은 화재를 막는 부적으로서 많은 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묘(淼)부적으로 주로 궁궐이나 지위가 높은 건축물에서 쓰인다. 그러나 그러한 자료 가치를 제대로 규명할 겨를도 없이 건물 자재들은 이리 저리 흩어져 조립될 수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복개당의 존재 및 역사적 유래에 대한 자료는 무라야마 지준이 1937년에서 보고한 『[부락제](/topic/부락제)(部落祭)』가 전부일 정도이다. 이 자료에 보면, 당시로부터 약150년 전에 손복개(孫福介)라고 하는 마을민이 선몽으로 세조대왕을 마을의 주신으로 모시면서 당을 짓게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무라야마 지준이 밝힌 조사내용은 1920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토대로 보면 복개당은 1770년쯤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에 복개당에 대한 언급이 나와 눈길을 끈다. 이 자료는 1639년(인조 17)에 기록된 것인데 그 내용은, “……복개당(福介堂) 무녀(巫女)의 어미인 무인(戊寅)을 먼저 수금(囚禁)하겠다”는 의금부(義禁府)의 계 등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인조실록」에서도 복개당에 관한 기록이 보여 흥미롭다. 의금부가 무녀들이 행한 저주에 대한 것을 심문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복개당(福介堂) 무녀(巫女) 운……”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 와 『조선왕조실록』 두 기록에 보이는 복개당은동일한 당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건 발생연도도 동일하다. 복개당이 마포 신수동에 있었다는 것은 본 사건 기록에서‘무녀 천금(賤今)이 공덕리(孔德里) 조춘금(趙春金)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을 도사(都事)가 붙잡으러 가자, 춘금의 아내가 용산(龍山)에 가 있다고 속였는데……운운’ 등의 지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공덕리와 용산은모두 마포 일대의 지역으로서 신수동복개당과 인접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은 두 자료의 기록으로 보아서 분명 복개당은 1639년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복개당의 주신으로 모셔진 세조대왕(世祖大王)은 1417년에 태어나서 1468년에 사망한 조선 제7대 왕이다. 무속신앙에서 역사적 인물이 신으로 등극되는 것은 사후의 일이기 때문에 세조대왕이 무속신앙의 신격으로 봉신되기 위해서는 1468년 이후여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아 복개당은 빠르게는 1468년에 지어진 것이고 늦게는 1639년에 건립되어졌을 것이라는 답에 다다르게 된다. 이는 무라야마 지준이 밝힌 것 보다는 131년에서 302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복개당 현판에서 ‘복개(福介)’라는 명칭이 마을 사람 손복개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무라야마 지준의 자료는 일찍이 수긍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복개당에 관한 여타의 서술들은 모두 무라야마 지준이 밝힌 마을민 손복개 이름과 연관지어 설명되어 왔다. 이를 테면 “마을민 손복개가 어느 날 꿈에서 노인을 만났는데, 마을 인근 괴목 위에 걸린 세조대왕 [영정](/topic/영정)을 찾아다 마을에 당을 지어 [봉안](/topic/봉안)하고 매년 봄, 여름, 가을 세 차례 제를 지내게 되면 자신의 집은 물론 마을 모두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 하였고, 그 후 사람들은 마을에 당을 짓고 그 명칭을 꿈에 계시 받은 손복개 이름을 따서 복개당라고 불렀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과오는 그동안 무라야마 지준 자료에 대한 검증이나 이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나라 마을당과 관련된 어원 탐구는 일찍이 조지훈의 ‘累石壇, 神樹, 堂집 신앙 연구’에서 행해졌다. 조지훈은 고대 민간신앙의 뿌리는 오늘날까지 전국적으로 광범위한분포를 보이고 있는 돌무더기[石壇], 신목[神樹], 당집(堂집) 형태로 된 신앙 공간이라고 규정하고, 석단과 신목 형태는 혼합되어 전승된 애초 형태의 신앙처지만 당집은 후기에 발달한 것이라고 하였다. 신앙 대상으로 삼고 있는 천신, 산신, 부락신의 세 [가지](/topic/가지) 요소는 각각 동등한 지위에서 삼위일체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이는 우리 한민족 신앙의 원형적 모태가 되는 의 환인, 환웅, 단군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시공 변화에 따라 오늘날 수많은 형태와 갈래를 보이고 있는 마을신앙은 천신계, 산신계, 신계, 성황계, 계 등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서울 마포의 복개당은 神계에 속하는 것으로 이는 천신신앙인 ‘신’이 전화(轉化)되어 부락신이 된 것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통용되는 ‘밝다’의 ‘밝’은 원래 ‘’에서 나온 것으로 그 뜻은 ‘신(神)’, ‘하늘[天]’, ‘해[日]’이다. 조지훈은 ‘’은 곧 ‘백(白), 광명(光明),태양(太陽)’을 위하는 이른바 하늘숭배에서 온 것이라고 하고, 이것이 ‘불[火]’, ‘들[野]’, ‘국토(國土)’의 뜻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형어 ‘’에서 전해진神에서의 “”은 옛 지명의 ‘伐’, ‘弗’, ‘發’, ‘火’, ‘原’,‘坪’, ‘平’, ‘林’, ‘沙’, ‘國’ 등으로 기사(記寫)되었는데 이를 한편으로는 ‘白’, ‘朴’, ‘碧’, ‘卜’, ‘伏’, ‘福’으로도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전개에 따라 복개당은 결국 ‘’의 ㄱ받침계의 신명(神名)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참조[순창성황제](/topic/순창성황제)
참고문헌朝鮮の鄕土神祀-部落祭 (村山智順, 朝鮮總督府, 193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 무속신 고찰 (양종승, 몽골학 4, 1996)
무신도에 나타난 무신의 상징성 (양종승, 박물관지, 인하대학교 박물관, 1997)
무당 귀물연구 (양종승, 생활문물연구 2, 국립민속박물관, 2001)
불교회화 (유마리·김승희, 솔출판사, 2004)
서울이태원 부군당굿 (양종승, 민속원, 2007)
서일본지역 한국의 불상과 불화 (박은경·정은우, 도서출판 민족문화, 2008)
불화, 찬란한 불교 미술의 세계 (김정희, 돌[베개](/topic/베개), 2009)
복개당의 내력과 서울무속 (양종승, 생활문물연구 26, 국립민속박물관, 2010)
참조[순창성황제](/topic/순창성황제)
참고문헌朝鮮の鄕土神祀-部落祭 (村山智順, 朝鮮總督府, 193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 무속신 고찰 (양종승, 몽골학 4, 1996)
무신도에 나타난 무신의 상징성 (양종승, 박물관지, 인하대학교 박물관, 1997)
무당 귀물연구 (양종승, 생활문물연구 2, 국립민속박물관, 2001)
불교회화 (유마리·김승희, 솔출판사, 2004)
서울이태원 부군당굿 (양종승, 민속원, 2007)
서일본지역 한국의 불상과 불화 (박은경·정은우, 도서출판 민족문화, 2008)
불화, 찬란한 불교 미술의 세계 (김정희, 돌[베개](/topic/베개), 2009)
복개당의 내력과 서울무속 (양종승, 생활문물연구 26, 국립민속박물관, 2010)
내용복개당이 헐린 지 20여 년이 지난 1998년, 복개당 자료 14건이 유물 공개구매에 의해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이동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구입한 14건의 유물 가운데, 무신(巫神) 그림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관우, 장비로 총 6점이다. 복개당이 헐리는 과정에서 무신도 이외의 여타 물건들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행방이 묘연하다. 무신도를 포함한 일부가 동[대문](/topic/대문)에 있는 [관성제군](/topic/관성제군)묘(동묘)로 옮겨 갔다는 말이있긴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무신도 6점만이 복개당 무신도의 전부인지는 알 수 없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복개당 무신도로 분류된 6점 가운데, 정확하게 복개당 것으로 확인된 것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으로 4점뿐이다. 이 그림들은 불화를 전문으로 그렸던 월파(月波), 삼여(三如), 행활(幸活) 등의 화승(畫僧)들이 1868년 복개당중수를 전후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화승이 그렸다는 것은 중수기를 통해 알 수있고, 시기 역시 중수기와 국립민속박물관 보존과학팀에서 그림에 사용된 안료를 분석한 결과에서 확인되었다.

나머지 두 점의 무신도는 관우와 장비를 그린 것인데 이미 밝혀진 4점(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과는 또다른 사람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누가 언제 그렸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림 재료로 사용된 면은 종이에 배접되었는데 거친 삼실로 짜서 만든 일본제 마대(麻袋)를 재활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그림은 도안으로 보아 대략 일ㅋ강점기 때쯤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4점의 무신도처럼 작자가 밝혀진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고, 일반적으로 무신도는 작자미상이다. 따라서 관우와 장비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점의 그림이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과 함께 마포 복개당에 모셔졌었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그림들이 세조대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마을](/topic/마을)당에 모셔졌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적 인물인 관우와 장비가 조선시대 군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마을당에 모셔지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연유가 뒤따라 할 것이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서는 그러한 것을 전혀 살필 수가 없다. 복개당 유물 수습에 참여한 윤열수(가회민화박물관 관장)도 당시 복개당에서 이 그림들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하며, 1998년 국립민속박물관에복개당 유물을 납품한 고미술업자도 고령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996년 이 그림들을 조자용으로부터 단순히 구입한 것 이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아무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복개당 유물로 분류되고 있는 관우와 장비 그림은 주인공들이 [장군](/topic/장군)복을 입고 [언월도](/topic/언월도), [삼지창](/topic/삼지창), 무차, 깃발을 들고 있는데 이들이 어디서 봉신되었던 것인지는 조사와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1. 세조대왕 :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당 내부의 가운데에 [봉안](/topic/봉안)되었던 세조대왕(世祖大王, 1417~1468)은 복개당에서 주신으로 모셔졌었다. 세조대왕은 1455년부터 1468년까지14년간 조선 제7대 왕으로 재위하였는데,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 세종대왕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였고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topic/향악)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단종이 12살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지만,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뒤, 1455년 윤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다. 세조대왕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1418~1483)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1428년 당시 진양대군이었던 세조와 혼인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덕종(의경세자)과 예종의 모후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시대 최초 대왕대비로 봉해졌다. 한편 그녀는 1455년 계유정난이 일어날 때, 남편인 진양대군이 정난에 나가는 것을 [부추](/topic/부추)겼다고한다. 또한 단종을 상왕으로 올리는 것, 유배를 보내는 것, 사약을 내리는 것 등에도 관여하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세조대왕의 비 정희왕후는 정치에 직·간접으로 관여한여장부 기질을 가진 여인으로 알려져있다. 그녀는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가 되었고,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레 병으로 승하하자 당일 바로 한명회와결탁하여 둘째 손자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린 뒤 자신은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조선 최초의 수렴첨정을 하기도 하였다.

복개당에 봉안된 군왕이 세조대왕이라는 것은 1937년 무라야마 지준의 자료에서 밝혀진 것이다. 무라야마 지준의 자료에 복개당 내부 정면에 세조존영(世祖尊影)이 봉안되어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1966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 지명총람(1)-서울』에는 복개당이 세종대왕을 모신 당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표기된 듯하다. 무라야마 지준책 뒷부분의 부록 편에 실린 사진 자료에서도 복개당 제신이 세조대왕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라야마 지준은 그의 책을 통해 복개당에 세조대왕이 어떻게 봉안되게 되었는가도 함께 밝히고 있다.

2. 삼불제석 : 복개당의 삼불제석(三佛帝釋)은 [한지](/topic/한지)를 비단에 배접하여 조성하였다. 무라야마 지준이 보고한 자료에서 삼불제석은 세조존영 그 양옆에 각각 삼불(三佛) 한 장씩이 걸려있다고 하였는데 그 두 그림 중 하나이다. 삼불이라고 말한 두 개 그림(삼불제석과 아미타여래삼존불)의 좌우 배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삼불이라고 칭하는 무신도가 세조존영 양옆으로 각각 모셔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복개당 삼불제석은 불화의 제석천 그림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그림이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무속화가불화 기법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려진 무속화는 불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그 형식이 불화와 흡사한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복개당의 삼불제석은 화승이 그렸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복개당의 또 다른 불교식 그림인 아미타여래삼존불을 보면 불화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있다. 아마타여래삼존불도 무속신앙의 부처신으로 봉안되기 위해 그려진 것이지만 불화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복개당 삼불제석 그림이 불화의 제석천 그림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도상적 측면에서 고려 불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제석도가 현재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쇼타쿠원(聖澤院)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형식을 보면, 보관을 쓴 제석천이 봉황 장식으로 된 옥좌에 앉아 오른손으로 천선(天扇, 제석천의 부채)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이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제석천 아래 좌우 두 사람이 공손하게 [합장](/topic/합장)을 하고 자비로운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이 그림은 대표적 고려 불화로서 복개당삼불제석 그림과 매우 흡사하다. 그림에 나타난 세 사람 모두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 뒷부분에 광배를 두르고 있는 것도 복개당 그림과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복개당의 삼불제석(제석천) 그림에 표현된 복식 형태나 자태 등을 보면 고려시대의 불화인 일본 쇼타쿠원 소장의 제석도와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불화와복개당 삼불제석의 연관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또 다른 자료로는 일본 후쿠이현(福井縣) 에이헤이사(永平寺)에 소장되어 있는 1483년에 그려진 조선시대 삼제석천도를 비롯하여, 1741년에 조성된 여수 흥국사 대법당 제석천도, 1753년에 조성된 선암사 제석도 등을 들 수 있다. 이 그림들을 보아 복개당 삼불제석 그림이 불화 제석천 그림을 이어받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이번에는 무라야마 지준이 복개당에 봉안되었던 제석천을 삼불(三佛)이라고 명기한 문제이다. 이 그림이 국립민속박물관 목록에는 ‘탱화’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박물관이소장하면서 붙인 것이지 본래 명칭은 아니다. 논한 바와 같이 복개당 삼불제석 그림은 고려불화 제석천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인데, 마을신앙에서는 이것을 ‘삼불’이라고 불렀기 때문이고, 무라야마 지준은 현장조사에서 지역민들과 복개당 사람들로부터 들은 내용을 그대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불교의 제석천이?었다. 이 신격은 무속신앙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봉신되고 있으며 또한 불교로부터 무속으로 넘어온 대표적인 불교적 무신이다. 무신으로서의 삼불제석은 그림 중앙과 좌우에 배치된 세 명의 승려가 흰 [장삼](/topic/장삼)에 [고깔](/topic/고깔)을 쓰고 합장을 하고서 연꽃으로 장식된 좌대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리고 삼불제석 주위에는 천상세계를 상징하는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는 경우도 있고 제석님이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모아 내영인상(來迎印相)을 하고서 양손으로 단주를 늘어뜨려 잡고 있기도 하다. 삼불제석은 무속 신앙에서 자손점지, 수명장수 등을 관장한다.

3. 부처 : 복개당 부처 그림은 무라야마 지준이 보고한 자료에서 당 내부 중앙에 모셔진 세조존영 좌우 중 하나이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무라야마 지준은 이 그림도 삼불제석과 함께 삼불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러한 것은 그림에서 나타나는 세 명의 인물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불교에서는 아미타삼존불로 통하지만 무속세계에서는 부처로봉신된다. 무신으로서의 부처는 광배를 배경으로 수인을 하고서 연화대에 앉아 있다. 가로 55㎝, 세로 115㎝의 규격으로 한지에 비단을 배접하여 조성한 것이다. 무속 세계에서의 부처는 중생을 구원하는 신으로 모셔진다. 이러한 것은 구원불로서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불교의 기능과 같다. 그러면서 부처는 다른 신격들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담당한다.

4. 칠성 : 복개당 칠성(七星) 그림도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등과 함께 같은 시기에 동일 화승에 의해 조성되었다. 가로 55.3㎝, 세로 115㎝의 규격으로 한지에 비단을 배접하여 조성하였는데 도안이 상당히 이색적이다. 일월과 칠성이 혼합된 형태인데다 그림이 상하 두 단계로 겹쳐 그려졌기 때문이다. 위쪽 상단 부분에서는 푸르른 하늘 사이로 떠 있는 구름을 배경으로 해와 달, 그 밑으로 둥그런 일곱 개 별들이 서로 연결되어 일월칠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아래쪽 부분에는 일월칠성을 사람으로 형상화하였다.광배를 배경으로 한 일월 상징의 두 사람과 칠성 상징의 일곱 사람이 윗줄 세 명 아랫줄 네 명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들이 뭉게구름 속에서 소매가 넓은 포를 입고 공수한 자세로 서 있다. 무속신앙에서의 칠성은 인간의 명과 복을 관장한다. 칠성은 하늘의 천수를 뿌려 인간이 무병장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소원성취, 자손점지도 도와준다. 무속의례에서는 이와 같이 중요한 임무를 갖고 있는 칠성을 맞이하기 위해서 [재계](/topic/재계)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상탕에 머리 감고 중탕에 몸 씻고 하탕에 수족 씻은 후, 백모래로이 닦고 옥경수에 입 씻고서 몸단장을 깨끗하게 한다.
내용복개당이 헐린 지 20여 년이 지난 1998년, 복개당 자료 14건이 유물 공개구매에 의해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이동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구입한 14건의 유물 가운데, 무신(巫神) 그림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 관우, 장비로 총 6점이다. 복개당이 헐리는 과정에서 무신도 이외의 여타 물건들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행방이 묘연하다. 무신도를 포함한 일부가 동[대문](/topic/대문)에 있는 [관성제군](/topic/관성제군)묘(동묘)로 옮겨 갔다는 말이있긴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무신도 6점만이 복개당 무신도의 전부인지는 알 수 없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복개당 무신도로 분류된 6점 가운데, 정확하게 복개당 것으로 확인된 것은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으로 4점뿐이다. 이 그림들은 불화를 전문으로 그렸던 월파(月波), 삼여(三如), 행활(幸活) 등의 화승(畫僧)들이 1868년 복개당중수를 전후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화승이 그렸다는 것은 중수기를 통해 알 수있고, 시기 역시 중수기와 국립민속박물관 보존과학팀에서 그림에 사용된 안료를 분석한 결과에서 확인되었다.

나머지 두 점의 무신도는 관우와 장비를 그린 것인데 이미 밝혀진 4점(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과는 또다른 사람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누가 언제 그렸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림 재료로 사용된 면은 종이에 배접되었는데 거친 삼실로 짜서 만든 일본제 마대(麻袋)를 재활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그림은 도안으로 보아 대략 일ㅋ강점기 때쯤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4점의 무신도처럼 작자가 밝혀진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고, 일반적으로 무신도는 작자미상이다. 따라서 관우와 장비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점의 그림이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칠성과 함께 마포 복개당에 모셔졌었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그림들이 세조대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마을](/topic/마을)당에 모셔졌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적 인물인 관우와 장비가 조선시대 군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마을당에 모셔지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연유가 뒤따라 할 것이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서는 그러한 것을 전혀 살필 수가 없다. 복개당 유물 수습에 참여한 윤열수(가회민화박물관 관장)도 당시 복개당에서 이 그림들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하며, 1998년 국립민속박물관에복개당 유물을 납품한 고미술업자도 고령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996년 이 그림들을 조자용으로부터 단순히 구입한 것 이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아무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복개당 유물로 분류되고 있는 관우와 장비 그림은 주인공들이 [장군](/topic/장군)복을 입고 [언월도](/topic/언월도), [삼지창](/topic/삼지창), 무차, 깃발을 들고 있는데 이들이 어디서 봉신되었던 것인지는 조사와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1. 세조대왕 :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당 내부의 가운데에 [봉안](/topic/봉안)되었던 세조대왕(世祖大王, 1417~1468)은 복개당에서 주신으로 모셔졌었다. 세조대왕은 1455년부터 1468년까지14년간 조선 제7대 왕으로 재위하였는데, 아버지 세종대왕과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 세종대왕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였고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topic/향악)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단종이 12살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지만,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뒤, 1455년 윤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다. 세조대왕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1418~1483)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1428년 당시 진양대군이었던 세조와 혼인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덕종(의경세자)과 예종의 모후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시대 최초 대왕대비로 봉해졌다. 한편 그녀는 1455년 계유정난이 일어날 때, 남편인 진양대군이 정난에 나가는 것을 [부추](/topic/부추)겼다고한다. 또한 단종을 상왕으로 올리는 것, 유배를 보내는 것, 사약을 내리는 것 등에도 관여하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세조대왕의 비 정희왕후는 정치에 직·간접으로 관여한여장부 기질을 가진 여인으로 알려져있다. 그녀는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가 되었고,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레 병으로 승하하자 당일 바로 한명회와결탁하여 둘째 손자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린 뒤 자신은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조선 최초의 수렴첨정을 하기도 하였다.

복개당에 봉안된 군왕이 세조대왕이라는 것은 1937년 무라야마 지준의 자료에서 밝혀진 것이다. 무라야마 지준의 자료에 복개당 내부 정면에 세조존영(世祖尊影)이 봉안되어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1966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 지명총람(1)-서울』에는 복개당이 세종대왕을 모신 당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표기된 듯하다. 무라야마 지준책 뒷부분의 부록 편에 실린 사진 자료에서도 복개당 제신이 세조대왕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라야마 지준은 그의 책을 통해 복개당에 세조대왕이 어떻게 봉안되게 되었는가도 함께 밝히고 있다.

2. 삼불제석 : 복개당의 삼불제석(三佛帝釋)은 [한지](/topic/한지)를 비단에 배접하여 조성하였다. 무라야마 지준이 보고한 자료에서 삼불제석은 세조존영 그 양옆에 각각 삼불(三佛) 한 장씩이 걸려있다고 하였는데 그 두 그림 중 하나이다. 삼불이라고 말한 두 개 그림(삼불제석과 아미타여래삼존불)의 좌우 배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삼불이라고 칭하는 무신도가 세조존영 양옆으로 각각 모셔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복개당 삼불제석은 불화의 제석천 그림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그림이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무속화가불화 기법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려진 무속화는 불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그 형식이 불화와 흡사한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복개당의 삼불제석은 화승이 그렸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복개당의 또 다른 불교식 그림인 아미타여래삼존불을 보면 불화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있다. 아마타여래삼존불도 무속신앙의 부처신으로 봉안되기 위해 그려진 것이지만 불화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복개당 삼불제석 그림이 불화의 제석천 그림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도상적 측면에서 고려 불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제석도가 현재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쇼타쿠원(聖澤院)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형식을 보면, 보관을 쓴 제석천이 봉황 장식으로 된 옥좌에 앉아 오른손으로 천선(天扇, 제석천의 부채)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이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제석천 아래 좌우 두 사람이 공손하게 [합장](/topic/합장)을 하고 자비로운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이 그림은 대표적 고려 불화로서 복개당삼불제석 그림과 매우 흡사하다. 그림에 나타난 세 사람 모두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 뒷부분에 광배를 두르고 있는 것도 복개당 그림과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복개당의 삼불제석(제석천) 그림에 표현된 복식 형태나 자태 등을 보면 고려시대의 불화인 일본 쇼타쿠원 소장의 제석도와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불화와복개당 삼불제석의 연관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또 다른 자료로는 일본 후쿠이현(福井縣) 에이헤이사(永平寺)에 소장되어 있는 1483년에 그려진 조선시대 삼제석천도를 비롯하여, 1741년에 조성된 여수 흥국사 대법당 제석천도, 1753년에 조성된 선암사 제석도 등을 들 수 있다. 이 그림들을 보아 복개당 삼불제석 그림이 불화 제석천 그림을 이어받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이번에는 무라야마 지준이 복개당에 봉안되었던 제석천을 삼불(三佛)이라고 명기한 문제이다. 이 그림이 국립민속박물관 목록에는 ‘탱화’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박물관이소장하면서 붙인 것이지 본래 명칭은 아니다. 논한 바와 같이 복개당 삼불제석 그림은 고려불화 제석천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인데, 마을신앙에서는 이것을 ‘삼불’이라고 불렀기 때문이고, 무라야마 지준은 현장조사에서 지역민들과 복개당 사람들로부터 들은 내용을 그대로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불교의 제석천이?었다. 이 신격은 무속신앙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봉신되고 있으며 또한 불교로부터 무속으로 넘어온 대표적인 불교적 무신이다. 무신으로서의 삼불제석은 그림 중앙과 좌우에 배치된 세 명의 승려가 흰 [장삼](/topic/장삼)에 [고깔](/topic/고깔)을 쓰고 합장을 하고서 연꽃으로 장식된 좌대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리고 삼불제석 주위에는 천상세계를 상징하는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는 경우도 있고 제석님이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모아 내영인상(來迎印相)을 하고서 양손으로 단주를 늘어뜨려 잡고 있기도 하다. 삼불제석은 무속 신앙에서 자손점지, 수명장수 등을 관장한다.

3. 부처 : 복개당 부처 그림은 무라야마 지준이 보고한 자료에서 당 내부 중앙에 모셔진 세조존영 좌우 중 하나이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무라야마 지준은 이 그림도 삼불제석과 함께 삼불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러한 것은 그림에서 나타나는 세 명의 인물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불교에서는 아미타삼존불로 통하지만 무속세계에서는 부처로봉신된다. 무신으로서의 부처는 광배를 배경으로 수인을 하고서 연화대에 앉아 있다. 가로 55㎝, 세로 115㎝의 규격으로 한지에 비단을 배접하여 조성한 것이다. 무속 세계에서의 부처는 중생을 구원하는 신으로 모셔진다. 이러한 것은 구원불로서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불교의 기능과 같다. 그러면서 부처는 다른 신격들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담당한다.

4. 칠성 : 복개당 칠성(七星) 그림도 세조대왕, 삼불제석, 부처 등과 함께 같은 시기에 동일 화승에 의해 조성되었다. 가로 55.3㎝, 세로 115㎝의 규격으로 한지에 비단을 배접하여 조성하였는데 도안이 상당히 이색적이다. 일월과 칠성이 혼합된 형태인데다 그림이 상하 두 단계로 겹쳐 그려졌기 때문이다. 위쪽 상단 부분에서는 푸르른 하늘 사이로 떠 있는 구름을 배경으로 해와 달, 그 밑으로 둥그런 일곱 개 별들이 서로 연결되어 일월칠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아래쪽 부분에는 일월칠성을 사람으로 형상화하였다.광배를 배경으로 한 일월 상징의 두 사람과 칠성 상징의 일곱 사람이 윗줄 세 명 아랫줄 네 명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들이 뭉게구름 속에서 소매가 넓은 포를 입고 공수한 자세로 서 있다. 무속신앙에서의 칠성은 인간의 명과 복을 관장한다. 칠성은 하늘의 천수를 뿌려 인간이 무병장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소원성취, 자손점지도 도와준다. 무속의례에서는 이와 같이 중요한 임무를 갖고 있는 칠성을 맞이하기 위해서 [재계](/topic/재계)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상탕에 머리 감고 중탕에 몸 씻고 하탕에 수족 씻은 후, 백모래로이 닦고 옥경수에 입 씻고서 몸단장을 깨끗하게 한다.
문화재관리국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14-무의식편1983
동문선조선무속의 연구赤松智城·秋葉隆 共著, 심우성 옮김1991
민속원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충청도국립문화재연구소2005
국립문화재연구소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서울시ㆍ경기도ㆍ강원도2005
민속악 논문집 7집무의식에 사용되는 무구 연구최진아2007
국립문화재연구소인간과 신령을 잇는 상징, 무구-전라남도ㆍ전라북도ㆍ제주도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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