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각 가정에서 부계 직계 혈통 가운데 [기제사](/topic/기제사)를 모시는 조령의 신체인 귀신종이를 [안방](/topic/안방)에 [봉안](/topic/봉안)하여 위하는 의례. 현재 경상도 동남해안 지역의 어촌[마을](/topic/마을)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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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황경숙 |
정의 | 각 가정에서 부계 직계 혈통 가운데 [기제사](/topic/기제사)를 모시는 조령의 신체인 귀신종이를 [안방](/topic/안방)에 [봉안](/topic/봉안)하여 위하는 의례. 현재 경상도 동남해안 지역의 어촌[마을](/topic/마을)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 정의 | 각 가정에서 부계 직계 혈통 가운데 [기제사](/topic/기제사)를 모시는 조령의 신체인 귀신종이를 [안방](/topic/안방)에 [봉안](/topic/봉안)하여 위하는 의례. 현재 경상도 동남해안 지역의 어촌[마을](/topic/마을)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 내용 | 귀신종이모시기는 조상이 돌아가신 뒤 조령이 깃든 신체를 집 안에 모시는 [봉안](/topic/봉안)의례에서 출발한다. 귀신종이는 주로 [기제사](/topic/기제사)를 베푸는 [안방](/topic/안방)의 [시렁](/topic/시렁) 위에 얹거나 안방의 북쪽 또는 서쪽 벽면에 부착한다. 봉안의례의 시기와 방식은 가정마다 상이하다. 귀신종이를 봉안하는 시점은 장례 후 3일, [삼우제](/topic/삼우제) 후 3일, 사후 100일, 첫 기일(忌日) 등이 일반적이다. 봉안의례는 그 집 [대주](/topic/대주)가 주관한다. 의례 방식은 기제사와 비슷하지만 가정에 따라서는 [헌작](/topic/헌작) 횟수와 절 횟수가 상이하며 봉안 시점 역시 헌작 이전, 헌작 이후 등으로 다르다. 어떤 가정에서는 제물을 진설하고 귀신종이를 봉안한 다음 제의를 베푼다. 또 어떤 가정에서는 제의를 베푼 뒤 귀신종이를 봉안하기도 한다. 제의를 베풀 때 유교식 제례와 달리 열두 차례 술과 절을 올리기도 한다. 귀신종이를 모신 이후에는 매해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유교식으로 지낸다. 제사를 모실 때에는 지방을 따로 써 붙인다. 유교식 제례 외에 귀신종이를 모신 가정에서는 평소 집안에 대소사가 있거나 새 식구를 맞이할 때 귀신종이에 먼저 고하며, 재물이 생기거나 특별한 음식을 장만했을 경우 먼저 귀신종이에 바쳐 재수있기를 기원한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아픈 이가 생기면 [정화수](/topic/정화수), 술, 과일 등을 진설하고 그 집 대주나 주부가 [비손](/topic/비손)하면서 안과태평과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귀신종이를 더 이상 모시기 않게 되었을 경우에는 [손 없는 날](/topic/손없는날)에 제물을 차려 유교식으로 제의를 치른 후 그 집 대주가 깨끗한 곳에 가서 태운다. | 내용 | 귀신종이모시기는 조상이 돌아가신 뒤 조령이 깃든 신체를 집 안에 모시는 [봉안](/topic/봉안)의례에서 출발한다. 귀신종이는 주로 [기제사](/topic/기제사)를 베푸는 [안방](/topic/안방)의 [시렁](/topic/시렁) 위에 얹거나 안방의 북쪽 또는 서쪽 벽면에 부착한다. 봉안의례의 시기와 방식은 가정마다 상이하다. 귀신종이를 봉안하는 시점은 장례 후 3일, [삼우제](/topic/삼우제) 후 3일, 사후 100일, 첫 기일(忌日) 등이 일반적이다. 봉안의례는 그 집 [대주](/topic/대주)가 주관한다. 의례 방식은 기제사와 비슷하지만 가정에 따라서는 [헌작](/topic/헌작) 횟수와 절 횟수가 상이하며 봉안 시점 역시 헌작 이전, 헌작 이후 등으로 다르다. 어떤 가정에서는 제물을 진설하고 귀신종이를 봉안한 다음 제의를 베푼다. 또 어떤 가정에서는 제의를 베푼 뒤 귀신종이를 봉안하기도 한다. 제의를 베풀 때 유교식 제례와 달리 열두 차례 술과 절을 올리기도 한다. 귀신종이를 모신 이후에는 매해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유교식으로 지낸다. 제사를 모실 때에는 지방을 따로 써 붙인다. 유교식 제례 외에 귀신종이를 모신 가정에서는 평소 집안에 대소사가 있거나 새 식구를 맞이할 때 귀신종이에 먼저 고하며, 재물이 생기거나 특별한 음식을 장만했을 경우 먼저 귀신종이에 바쳐 재수있기를 기원한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아픈 이가 생기면 [정화수](/topic/정화수), 술, 과일 등을 진설하고 그 집 대주나 주부가 [비손](/topic/비손)하면서 안과태평과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귀신종이를 더 이상 모시기 않게 되었을 경우에는 [손 없는 날](/topic/손없는날)에 제물을 차려 유교식으로 제의를 치른 후 그 집 대주가 깨끗한 곳에 가서 태운다. | 역사 | 귀신종이모시기의 연원을 알 수 있는 문헌 자료는 전무하다. 현전하는 귀신종이모시기는 대상 신격이 부계 혈통 중심으로 [기제사](/topic/기제사)를 모시는 조령으로 제한된다는 점, 상속체계가 장손을 중심으로 계승된다는 점, 관련 주의례가 유교식 제례방식의 기제사와 명절차례라는 점 등에서 유교식 제례와 맥을 함께 한다. 그러나 조령을 가신으로 여겨 귀신종이와 함께 복을 기원하면서 삼오라기, [무명](/topic/무명)실, 돈, 집문서 등을 함께 [봉안](/topic/봉안)하고 집안에 대소사가 있는 경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긴 경우 그 집 [대주](/topic/대주)나 주부가 [비손](/topic/비손)하며 안가태평과 복록을 기원한다는 점에서는 민간신앙의 조령숭배와 맥을 함께한다. 유교에서 [조상신](/topic/조상신)은 후손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여재(如在)하는 신으로 추모와 경모의 대상이다. 『[예기](/topic/예기)(禮記)』의 제통편(祭統編)에서는 “부모가 죽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생시에 하던 봉양을 미루어 행하고 생시에 못다 한 효도를 계속해서 하는 것(祭者所以追養繼孝也)”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귀신종이모시기는 유교식 제례를 넘어 안과태평과 후손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가신으로 숭상되기도 한다. 귀신종이모시기가 유교식 제례문화의 민속적 변형인지 민간신앙의 유교적 변형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유교의 제례문화가 유입되어 민간에까지 널리 퍼[지게](/topic/지게) 시기는 고려시대 말엽이다. 『고려사(高麗史)』 63 지권 제 17 예5 대부사서인제례조(大夫士庶人祭禮條)와 『고려사』 117 열전 권30 정몽주조에 공양왕 3년 6월 기사일(己巳日)에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게 제사 올리는 가묘에 관한 법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서민들 역시 부모로 제한되지만 조상 제례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명종 때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널리 보급되면서 서민층에서도 3대 4대에 이르는 조상을 모셔 제례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신종이모시기가 유교식 제례의 민속적 변형이라면 귀신종이모시기 문화는 유교 제례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려시대 말엽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귀신종이모시기는 경상도에서도 동남해안 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귀신종이모시기가 특정 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귀신종이모시기는 유교의 제례문화 유입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 아니라 동남해안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형성 전승된 토착적 [조상숭배](/topic/조상숭배)의 전통에 연원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 권 32에 “양서에 고구려에서 주거지의 왼쪽에 큰 집을 두어 귀신을 섬겼다 하였다.(梁書云 高句麗於所居之左 立大屋祭鬼神)”라 하였다. 이는 유교 제례문화가 유입되기 이전 우리나라에 조령을 가신으로 섬긴 토착적 조령 숭배신앙이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또한『삼국지』위지 동이전 동옥저조에 “그들의 장사 지내는 것을 보면 큰 나무로 곽(槨)을 만드는데 그 길이가 10여 길이나 된다. (중략) 여기에 나무로 산 사람의 모양을 새겨 꽂아서 이 나무의 수효로 죽은 사람의 수를 알게 한다. 쌀을 넣어둔 질그릇을 곽 끝에 달아 두는 것 역시 그 나라 풍속이다.(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中略- 刻木如生形 隨死者位數 又有瓦䥶鎘 置米其中 編懸之於槨戶邊)”라고 하였다. 죽은 자의 형상을 나무에 새겨 묘에 봉안했다는 목각인형은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상징물을 넘어 조령이 현실계를 떠나서도 후손들과 연계할 수 있는 개성적 조령의 [빙의](/topic/빙의) 물로 기능하고, 쌀을 넣어둔 질그릇 역시 조령에게 바쳐진 [곡물](/topic/곡물)을 넘어 추상적 조령의 신체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오늘날 함경남도 해안지역과 경상도 해안지역에서 개성적 조령의 신체인 귀신종이와 추상적 조령의 신체인 시준단지가 짝을 이루며 전승되는 사실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귀신종이모시기는 옛 동옥저에 속한 함경도 동해안지역의 전통적 [조상모시기](/topic/조상모시기)가 해안선을 따라 전승된 민속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할 수 있다. 귀신종이모시기는 원래 [종가](/topic/종가)에서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종가에서 모시지 않게 되면서 종가가 아니더라도 제사를 지내는 가정에서는 모시는 조상에 한해 따로 귀신종이를 봉안하여 제례를 베풀고 있다. 귀신종이모시기의 대상 신격은 가정마다 상이하다. 가정에 따라 2대조, 3대조, 4대조를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3대조를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귀신종이모시기는 시준단지모시기와 더불어 경상도 동남해안지역 어촌[마을](/topic/마을)에서만 전승된다. 1990년 이전에는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에서도 귀신종이모시기를 행하는 가정이 몇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전승의 맥이 끊겨 현재 귀신종이를 모시는 가정은 찾아볼 수 없다. | 역사 | 귀신종이모시기의 연원을 알 수 있는 문헌 자료는 전무하다. 현전하는 귀신종이모시기는 대상 신격이 부계 혈통 중심으로 [기제사](/topic/기제사)를 모시는 조령으로 제한된다는 점, 상속체계가 장손을 중심으로 계승된다는 점, 관련 주의례가 유교식 제례방식의 기제사와 명절차례라는 점 등에서 유교식 제례와 맥을 함께 한다. 그러나 조령을 가신으로 여겨 귀신종이와 함께 복을 기원하면서 삼오라기, [무명](/topic/무명)실, 돈, 집문서 등을 함께 [봉안](/topic/봉안)하고 집안에 대소사가 있는 경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긴 경우 그 집 [대주](/topic/대주)나 주부가 [비손](/topic/비손)하며 안가태평과 복록을 기원한다는 점에서는 민간신앙의 조령숭배와 맥을 함께한다. 유교에서 [조상신](/topic/조상신)은 후손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여재(如在)하는 신으로 추모와 경모의 대상이다. 『[예기](/topic/예기)(禮記)』의 제통편(祭統編)에서는 “부모가 죽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생시에 하던 봉양을 미루어 행하고 생시에 못다 한 효도를 계속해서 하는 것(祭者所以追養繼孝也)”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귀신종이모시기는 유교식 제례를 넘어 안과태평과 후손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가신으로 숭상되기도 한다. 귀신종이모시기가 유교식 제례문화의 민속적 변형인지 민간신앙의 유교적 변형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유교의 제례문화가 유입되어 민간에까지 널리 퍼[지게](/topic/지게) 시기는 고려시대 말엽이다. 『고려사(高麗史)』 63 지권 제 17 예5 대부사서인제례조(大夫士庶人祭禮條)와 『고려사』 117 열전 권30 정몽주조에 공양왕 3년 6월 기사일(己巳日)에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게 제사 올리는 가묘에 관한 법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서민들 역시 부모로 제한되지만 조상 제례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명종 때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널리 보급되면서 서민층에서도 3대 4대에 이르는 조상을 모셔 제례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신종이모시기가 유교식 제례의 민속적 변형이라면 귀신종이모시기 문화는 유교 제례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려시대 말엽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귀신종이모시기는 경상도에서도 동남해안 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귀신종이모시기가 특정 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귀신종이모시기는 유교의 제례문화 유입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 아니라 동남해안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형성 전승된 토착적 [조상숭배](/topic/조상숭배)의 전통에 연원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 권 32에 “양서에 고구려에서 주거지의 왼쪽에 큰 집을 두어 귀신을 섬겼다 하였다.(梁書云 高句麗於所居之左 立大屋祭鬼神)”라 하였다. 이는 유교 제례문화가 유입되기 이전 우리나라에 조령을 가신으로 섬긴 토착적 조령 숭배신앙이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또한『삼국지』위지 동이전 동옥저조에 “그들의 장사 지내는 것을 보면 큰 나무로 곽(槨)을 만드는데 그 길이가 10여 길이나 된다. (중략) 여기에 나무로 산 사람의 모양을 새겨 꽂아서 이 나무의 수효로 죽은 사람의 수를 알게 한다. 쌀을 넣어둔 질그릇을 곽 끝에 달아 두는 것 역시 그 나라 풍속이다.(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中略- 刻木如生形 隨死者位數 又有瓦䥶鎘 置米其中 編懸之於槨戶邊)”라고 하였다. 죽은 자의 형상을 나무에 새겨 묘에 봉안했다는 목각인형은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상징물을 넘어 조령이 현실계를 떠나서도 후손들과 연계할 수 있는 개성적 조령의 [빙의](/topic/빙의) 물로 기능하고, 쌀을 넣어둔 질그릇 역시 조령에게 바쳐진 [곡물](/topic/곡물)을 넘어 추상적 조령의 신체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오늘날 함경남도 해안지역과 경상도 해안지역에서 개성적 조령의 신체인 귀신종이와 추상적 조령의 신체인 시준단지가 짝을 이루며 전승되는 사실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귀신종이모시기는 옛 동옥저에 속한 함경도 동해안지역의 전통적 [조상모시기](/topic/조상모시기)가 해안선을 따라 전승된 민속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할 수 있다. 귀신종이모시기는 원래 [종가](/topic/종가)에서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종가에서 모시지 않게 되면서 종가가 아니더라도 제사를 지내는 가정에서는 모시는 조상에 한해 따로 귀신종이를 봉안하여 제례를 베풀고 있다. 귀신종이모시기의 대상 신격은 가정마다 상이하다. 가정에 따라 2대조, 3대조, 4대조를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3대조를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귀신종이모시기는 시준단지모시기와 더불어 경상도 동남해안지역 어촌[마을](/topic/마을)에서만 전승된다. 1990년 이전에는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에서도 귀신종이모시기를 행하는 가정이 몇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전승의 맥이 끊겨 현재 귀신종이를 모시는 가정은 찾아볼 수 없다. | 지역사례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마을](/topic/마을)과 기성리에서는 조령의 신체인 귀신종이를 당세기에 넣은 뒤 [안방](/topic/안방)의 북쪽 벽면에 [시렁](/topic/시렁)이나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봉안](/topic/봉안)한다. 이 마을에서는 이를 ‘귀신토방구리’, ‘조상토방구리’라고 칭한다. 사동마을에서는 귀신토방구리를 사후 3년이 되는 해에 길일을 택해 봉안한다. 귀신토방구리 안에는 귀신종이만 넣거나 귀신종이와 더불어 흰 [광목](/topic/광목)천이나 [명주](/topic/명주)실을 함께 넣어 두기도 한다. 예전에는 [조상신](/topic/조상신)을 각기 다른 토방구리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자에는 내외를 [합사](/topic/합사)하여 모시는 방식으로 변모하였다. 한 번 모셔진 토방구리는 절대 열어볼 수 없다. 금기를 어기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속신으로 인해 선대로 물려받은 귀신토방구리에는 어떠한 신체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기성마을에서는 주로 귀신토방구리를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길일을 택해 봉안한다. 귀신종이를 모실 토방구리는 부정이 타지 않도록 장만할 때 첫눈에 들고 흠집이 없는 것으로 한다. 이때 절대로 흥정하지 않는다. 귀신토방구리를 모실 때에는 [기제사](/topic/기제사)와 동일한 제물로 [제상](/topic/제상)을 차린 뒤 조상신이 좌정할 것을 청하는 뜻으로 술과 절을 올린다. 귀신토방구리는 평소 흰 광목으로 덮어둔다. 덮개 천은 매해 정초에 깨끗한 날을 잡아 새것으로 갈아 놓는다. 한 번 모신 귀신토방구리는 새로 갈지 않고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면 [손 없는 날](/topic/손없는날)을 잡아 그 집 [대주](/topic/대주)가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낼 때에는 귀신토방구리 앞에 제사상을 차려서 제의를 베푼다. 지방은 따로 써 붙인다. 이 마을에서는 외지에 나간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면 귀신토방구리에 그 사실을 먼저 고한다. 이를 통해 외지에서 묻어 왔을지도 모를 부정이 가시게 된다고 여긴다. 이때 약간의 돈을 귀신토방구리 위에 바친다. 이렇게 바쳐진 돈은 다가오는 기일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제수 장만에 보태어 쓴다. 집안에 목돈이라도 들어오게 되면 먼저 귀신토방구리에 바친 뒤 꺼내어 쓴다. 이렇게 하면 재수가 좋다고 한다. 이 외에 좋은 음식이 들어오거나 특별한 음식을 장만했을 경우 먼저 귀신토방구리 앞에 진설한 뒤 먹는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그 집 대주나 주부가 [정화수](/topic/정화수)를 떠 놓고 [비손](/topic/비손)하기도 한다. 울진군 후포면 후포1리에서는 조령의 신체를 당세기에 봉안한다. 이를 ‘구신토방구리’ ‘귀신당세기’라고 칭한다. 구신토방구리는 조상이 돌아가시고 나서 일 년 안이나 일 년 뒤에 길일을 택해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정에 따라서는 조상이 돌아가신 뒤 삼 년째 되는 해에 길일을 택해 모시기도 한다. 구신토방구리 안에는 조령의 신체인 [한지](/topic/한지) 외에 [속옷](/topic/속옷)이나 천을 넣어 두기도 한다. 천을 넣을 때에는 적어도 옷을 지을 수 있는 크기라 하여 석 자 석 치를 넣는다. 집안에 혼사가 있는 경우에는 혼서를 받아온 천을 한 자 한 치로 잘라서 다음 혼사가 있을 때까지 넣어 두거나 덮어 둔다. 조령을 봉안할 토방구리를 장만하거나 제물을 장만할 때에는 먼저 목욕재계하고 몸가짐을 정갈하게 한다. 토방구리를 구입할 때에는 부정이 타지 않도록 타인과 대화를 꺼리며, 첫눈에 든 것을 택하여 흥정하지 않고 구입한다. 구신토방구리는 함부로 손댈 수 없기 때문에 토방구리를 옮길 때에는 낫으로 한 번만에 찍어 옮긴다.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낼 때에는 구신토방구리 앞에 제사상을 차린다. 이때 지방은 따로 써 붙인다. 이 밖에 집안에 대소사가 있거나 좋은 음식 또는 재물이 생기면 먼저 고하고 복을 기원한다. 영덕군 영덕읍 석리마을과 노물리에서는 조상의 신체인 한지를 흰 광목과 함께 당세기에 넣어 봉안한다. 이를 ‘귀신당세기’, ‘조상당세기’라고 칭한다. 귀신당세기는 가정에 따라 장례 후 바로 모시며, 사후 수년이 지나고 나서 모시기도 한다. 모실 때에는 대부분 유교식 제의를 행한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은 가정에서는 밥 한 그릇만 올려 고한 뒤 약식으로 모시기도 한다. 귀신당세기는 기제사를 지내는 동안만 모신다.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면 그 집 대주가 날을 잡아 깨끗한 곳에 가서 태운다. 가정에 따라 재복을 기원하면서 귀신당세기 안에 집문서, 땅문서, 돈등을 넣어 두기도 한다. 이때 “할배 할매 차지하소.”라고 고한다. 노름하는 사람의 경우 재수를 기원하며 판돈을 먼저 귀신당세기에 넣어 두었다가 쓰기도 한다. 기제사나 명절 차례 때에는 귀신당세기 앞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지낸다. 이때 지방을 따로 써 붙인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아픈 가족이 생기면 밥과 정화수를 올린 뒤 “김씨할머니네요, 집안 편코(편안하고) 아이들 잘되게 해 주이소.”라고 이령수하면서 비손한다. 영덕군 축산면 경정2리에서는 한지를 접어 만든 조령의 신체를 당세기에 봉안한다. 이를 ‘구신당세기’라고 칭한다. 이 마을에서는 주로 3대를 모시는 경우가 많다. 구신당세기는 조상이 돌아가신 지 100일째 되는 날에 모신다. 신체를 만들고 모시는 일은 그 집 대주가 주관한다. 구신당세기는 흰 천이나 한지로 만든 덮개를 덮어 안방 선반 위에 모신다. 덮개는 매해 새것으로 갈아 놓는다. 교체는 대개 정초에 길일을 택해 행한다. 이 마을에서는 기제사와 명절 차례 외에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약간의 제물을 바친 뒤 “이씨할매요, 김씨할매요, 오늘 집안에 좋은 일이 있으니 많이 잡수시고 재수 있게 해 주이소.”라고 이령수한다. 집안에 새 식구가 들어오면 먼저 구신당세기께 예를 갖춘다. 구신당세기를 없앨 때에는 먼저 술을 올리고 “조상님네요! 이씨할매요! 김씨할매요! 이제 좋은 데로 가시소.”라고 고한 뒤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계원1리 횡계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달리 ‘조상’이라고도 칭하면서 안방 벽면에 부착된 시렁 위에 왼쪽부터 나란히 선대 조상 순으로 펼쳐 봉안한다. 귀신종이는 시준단지와 함께 봉안하는 것이 관례이다. 시준단지는 귀신종이를 봉안한 시렁 위에 함께 봉안한다. 귀신종이는 돌아가신 선대 조상의 첫 기제사 때 그 집 대주가 봉안한다. 한 번 봉안한 귀신종이는 기제사를 베푸는 동안에만 모신다. 신체는 더러워지거나 훼손되어도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는다. 기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게 되면 귀신종이는 조상의 묘로 모셔가서 태우거나 부정이 없는 정갈한 곳으로 모셔가서 태운다. 귀신종이에 대한 제의는 정례적인 기제사 외에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 그 집안 대주가 비손하며 행하기도 한다. 경주시 양남면 하서4리 진리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조상’이라고 칭한다. 이 마을에서는 가정에 따라 [조상종이](/topic/조상종이)를 옷 또는 천과 함께 당세기에 넣어 안방 [장롱](/topic/장롱) 위나 장롱 안에 모신다. 그러나 조상종이를 당세기에 넣지 않고 안방의 북쪽이나 서쪽 벽면 상단에 붙이기도 한다. 조상종이를 벽면에 붙일 때에는 한지로 만든 띠를 중앙부에 두 줄 붙여 고정시킨다.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낼 때에는 조상종이 앞에 제사상을 차려서 유교식으로 지낸다. 지방은 따로 쓰지 않는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주부가 정화수를 떠 놓고 비손하면서 안과태평을 기원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에서는 귀신종이를 달리 ‘구신종이’라 칭한다. 귀신종이는 시준단지 옆에 봉안한다. [시주](/topic/시주)단지는 안방의 시렁이나 장롱 위에 얹고 귀신종이는 시주단지 옆 벽면에 나란히 붙인다. 이 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3대까지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귀신종이를 붙일 때에는 왼쪽에 할아버지, 오른쪽에 할머니를 모신다. 귀신종이는 매해 섣달그믐날에 각 가정의 주부가 새것으로 교체한다. 교체된 신체는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기제사를 지낼 때에는 귀신종이 앞에 제물을 진설한다. 지방은 따로 써 붙인다. 기제사 외에 가정에 길흉사가 있으면 먼저 귀신종이에 고하기도 하며, 비손하면서 복을 기원하기도 한다. 울주군 온산읍 오산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조상종이’라고도 칭한다. 이 마을에서는 조상종이를 주로 3대까지 모신다. 조상의 신체는 한지를 직사각 형태로 접어서 안방의 서쪽 벽면이나 북쪽 벽면에 한지로 만든 띠로 고정시켜 부착한다. 조상종이는 장례를 치른 후 손 없는 날을 받아 보신다. 조상종이를 봉안할 때에는 먼저 봉안할 장소 앞에 제상을 차린 뒤 그 집 대주가 조상종이를 조상님이 좌정할 것을 고하며 벽면에 붙인 뒤 술을 올리고 재배한다. 조상종이는 [고비](/topic/고비)(考妣) 합사하여 모신다. 한 번 봉안된 조상종이는 이후 절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둔다. 기제사는 귀신종이 앞에서 지낸다. 이 때 지방은 따로 쓴다. 기제사 외에 집안에 새식구를 맞이하거나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였을 때는 먼저 조상종이 앞에 먼저 고하고 예를 갖춘다. 또한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에는 조상종이 앞에 정화수와 간단한 제물을 진설한 뒤 주부가 비손한다. 조상종이는 장손에게 대물림하여 더 이상 조상종이를 모시지 않게 되면 그 집 대주가 조상종이를 떼어내어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부산광역시 [기장](/topic/기장)군 장안읍 효암리에서는 많은 가정에서 안방 벽면에 귀신종이를 봉안하고 있다. 귀신종이의 형태나 봉안하는 방식은 가정마다 상이하다. 어떤 가정에서는 귀신종이를 봉안한 벽면 위에 신위를 쓴 종이를 따로 붙여둔다. 어떤 가정에서는 띠를 만들지 않고 각기 풀로 벽면에 붙여 부착해 놓는다. 귀신종이를 봉안하는 시기는 주로 장례를 치른 뒤 3일째 되는 날이다. 귀신종이를 제작하거나 봉안하는 의례는 그 집 대주가 직접 주관한다. 귀신종이를 봉안할 때에는 먼저 귀신종이를 봉안할 장소 앞에 기제사와 동일하게 제물을 진설한 뒤 유교식으로 제를 올린다. 가정에 따라서는 열두 차례 술과 절을 올리기도 한다. 귀신종이가 낡거나 더러워지면 그해 정월 초하루나 섣달 그믐날을 택해 새것으로 교체한다. 교체할 때에는 달리 제의를 베풀지 않고 교체 사실을 먼저 고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교체된 귀신종이는 그 집 대주가 깨끗한 곳에 가서 좋은 곳으로 가시라는 염원을 아뢴 뒤 태운다. 귀신종이를 모시는 동안 [이사](/topic/이사)를 갈 경우에는 벽면에 부착된 귀신종이를 잘 거두어 깨끗한 상자에 모신 다음 대주가 조상신께 “조상님네요! 여기는 강입니다. 여기는 산모퉁이입니다. 여기는 도랑입니다. 조상님 건너갑시다.”라고 하며 이사 경로를 일일이 고하면서 모신다. 귀신종이모시기는 기제사와 명절 차례 외에도 집안에 대소사가 있으면 먼저 고하여 복을 빌고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정화수를 떠놓고 비손한다. 귀신종이를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었을 경우 그 집 대주가 마지막 기제사 후 귀신종이를 떼어내어 손 없고 맑은 곳에서 태운다.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학리 역시 많은 가정에서 현재까지 귀신종이를 모시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서는 [삼우제](/topic/삼우제)를 지내고 나서 귀신종이를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전에는 3년 [탈상](/topic/탈상) 후 길일을 잡아 봉안 하였다고 한다. 귀신종이를 봉안할 때에는 기제사와 동일하게 제물을 진설하고 제를 올린다. 그런 다음 그 집 대주가 직접 만든 귀신종이를 선대 귀신종이와 나란히 안방 벽면에 부착한다. 귀신종이는 한지를 직사각 형태로 접는다. 귀신종이 안쪽에는 신위를 써 두기도 한다. 한 번 봉안한 귀신종이는 그대로 둔다. 가정에 따라 귀신종이가 낡아 더러워지면 섣달그믐날에 새것으로 교체하기도 한다. 교체한 귀신종이는 조상의 묘에 가서 태우거나 손 없는 방향을 가려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이 마면에서는 기제사나 명절 차례 외에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과일과 술 등으로 간단히 제물을 마련하여 진설한 뒤 고할 뿐 달리 비손을 행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경남 거제시 옥포2동 조사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달리 ‘거장’이라고 칭한다. 거장은 부산시 기장군 해안지역 일대에서 전승되는 귀신종이와 형태나 성격이 동일하다. 그러나 동일 가정에서 모시는 경우라 하더라도 신체의 크기와 두께가 각기 다르다. 신체별로 신위를 쓰는 위치도 달라 신체 앞면에 쓰기도 하며 신체 안쪽에 쓰기도 한다. 거제와 통영지역의 거장은 부산시 기장군지역의 귀신종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의 크기가 작고 두께가 얇으며 거장 전체를 가리는 덮개가 함께 부착되어 있다.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낼 때 거장 앞에 제사상을 차려 유교식으로 모신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그 집 주부가 정화수를 떠놓고 안과태평과 재수대통을 비손하면서 기원한다. 거장을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면 그 집 대주가 거장을 떼어낸 뒤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 참고문헌 | 한국의 향토신앙 (장주근, 을유문화사, 1977) 三國志, 三國史記, 동남해안지방의 전통적 [조상숭배](/topic/조상숭배)신앙 연구 (황경숙, 한국문학논총 32, 2002) 동해안지역의 ‘귀신동이’․‘귀신당세기’․‘귀신종이’신앙 연구 (황경숙, 한국민족문화 21, 2003) 한국의 가정신앙-하 (김명자 외, 민속원, 2005) 한국의 가정신앙-경남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 지역사례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마을](/topic/마을)과 기성리에서는 조령의 신체인 귀신종이를 당세기에 넣은 뒤 [안방](/topic/안방)의 북쪽 벽면에 [시렁](/topic/시렁)이나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봉안](/topic/봉안)한다. 이 마을에서는 이를 ‘귀신토방구리’, ‘조상토방구리’라고 칭한다. 사동마을에서는 귀신토방구리를 사후 3년이 되는 해에 길일을 택해 봉안한다. 귀신토방구리 안에는 귀신종이만 넣거나 귀신종이와 더불어 흰 [광목](/topic/광목)천이나 [명주](/topic/명주)실을 함께 넣어 두기도 한다. 예전에는 [조상신](/topic/조상신)을 각기 다른 토방구리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자에는 내외를 [합사](/topic/합사)하여 모시는 방식으로 변모하였다. 한 번 모셔진 토방구리는 절대 열어볼 수 없다. 금기를 어기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속신으로 인해 선대로 물려받은 귀신토방구리에는 어떠한 신체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기성마을에서는 주로 귀신토방구리를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길일을 택해 봉안한다. 귀신종이를 모실 토방구리는 부정이 타지 않도록 장만할 때 첫눈에 들고 흠집이 없는 것으로 한다. 이때 절대로 흥정하지 않는다. 귀신토방구리를 모실 때에는 [기제사](/topic/기제사)와 동일한 제물로 [제상](/topic/제상)을 차린 뒤 조상신이 좌정할 것을 청하는 뜻으로 술과 절을 올린다. 귀신토방구리는 평소 흰 광목으로 덮어둔다. 덮개 천은 매해 정초에 깨끗한 날을 잡아 새것으로 갈아 놓는다. 한 번 모신 귀신토방구리는 새로 갈지 않고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면 [손 없는 날](/topic/손없는날)을 잡아 그 집 [대주](/topic/대주)가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낼 때에는 귀신토방구리 앞에 제사상을 차려서 제의를 베푼다. 지방은 따로 써 붙인다. 이 마을에서는 외지에 나간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면 귀신토방구리에 그 사실을 먼저 고한다. 이를 통해 외지에서 묻어 왔을지도 모를 부정이 가시게 된다고 여긴다. 이때 약간의 돈을 귀신토방구리 위에 바친다. 이렇게 바쳐진 돈은 다가오는 기일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제수 장만에 보태어 쓴다. 집안에 목돈이라도 들어오게 되면 먼저 귀신토방구리에 바친 뒤 꺼내어 쓴다. 이렇게 하면 재수가 좋다고 한다. 이 외에 좋은 음식이 들어오거나 특별한 음식을 장만했을 경우 먼저 귀신토방구리 앞에 진설한 뒤 먹는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그 집 대주나 주부가 [정화수](/topic/정화수)를 떠 놓고 [비손](/topic/비손)하기도 한다. 울진군 후포면 후포1리에서는 조령의 신체를 당세기에 봉안한다. 이를 ‘구신토방구리’ ‘귀신당세기’라고 칭한다. 구신토방구리는 조상이 돌아가시고 나서 일 년 안이나 일 년 뒤에 길일을 택해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정에 따라서는 조상이 돌아가신 뒤 삼 년째 되는 해에 길일을 택해 모시기도 한다. 구신토방구리 안에는 조령의 신체인 [한지](/topic/한지) 외에 [속옷](/topic/속옷)이나 천을 넣어 두기도 한다. 천을 넣을 때에는 적어도 옷을 지을 수 있는 크기라 하여 석 자 석 치를 넣는다. 집안에 혼사가 있는 경우에는 혼서를 받아온 천을 한 자 한 치로 잘라서 다음 혼사가 있을 때까지 넣어 두거나 덮어 둔다. 조령을 봉안할 토방구리를 장만하거나 제물을 장만할 때에는 먼저 목욕재계하고 몸가짐을 정갈하게 한다. 토방구리를 구입할 때에는 부정이 타지 않도록 타인과 대화를 꺼리며, 첫눈에 든 것을 택하여 흥정하지 않고 구입한다. 구신토방구리는 함부로 손댈 수 없기 때문에 토방구리를 옮길 때에는 낫으로 한 번만에 찍어 옮긴다.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낼 때에는 구신토방구리 앞에 제사상을 차린다. 이때 지방은 따로 써 붙인다. 이 밖에 집안에 대소사가 있거나 좋은 음식 또는 재물이 생기면 먼저 고하고 복을 기원한다. 영덕군 영덕읍 석리마을과 노물리에서는 조상의 신체인 한지를 흰 광목과 함께 당세기에 넣어 봉안한다. 이를 ‘귀신당세기’, ‘조상당세기’라고 칭한다. 귀신당세기는 가정에 따라 장례 후 바로 모시며, 사후 수년이 지나고 나서 모시기도 한다. 모실 때에는 대부분 유교식 제의를 행한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은 가정에서는 밥 한 그릇만 올려 고한 뒤 약식으로 모시기도 한다. 귀신당세기는 기제사를 지내는 동안만 모신다.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면 그 집 대주가 날을 잡아 깨끗한 곳에 가서 태운다. 가정에 따라 재복을 기원하면서 귀신당세기 안에 집문서, 땅문서, 돈등을 넣어 두기도 한다. 이때 “할배 할매 차지하소.”라고 고한다. 노름하는 사람의 경우 재수를 기원하며 판돈을 먼저 귀신당세기에 넣어 두었다가 쓰기도 한다. 기제사나 명절 차례 때에는 귀신당세기 앞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지낸다. 이때 지방을 따로 써 붙인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아픈 가족이 생기면 밥과 정화수를 올린 뒤 “김씨할머니네요, 집안 편코(편안하고) 아이들 잘되게 해 주이소.”라고 이령수하면서 비손한다. 영덕군 축산면 경정2리에서는 한지를 접어 만든 조령의 신체를 당세기에 봉안한다. 이를 ‘구신당세기’라고 칭한다. 이 마을에서는 주로 3대를 모시는 경우가 많다. 구신당세기는 조상이 돌아가신 지 100일째 되는 날에 모신다. 신체를 만들고 모시는 일은 그 집 대주가 주관한다. 구신당세기는 흰 천이나 한지로 만든 덮개를 덮어 안방 선반 위에 모신다. 덮개는 매해 새것으로 갈아 놓는다. 교체는 대개 정초에 길일을 택해 행한다. 이 마을에서는 기제사와 명절 차례 외에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약간의 제물을 바친 뒤 “이씨할매요, 김씨할매요, 오늘 집안에 좋은 일이 있으니 많이 잡수시고 재수 있게 해 주이소.”라고 이령수한다. 집안에 새 식구가 들어오면 먼저 구신당세기께 예를 갖춘다. 구신당세기를 없앨 때에는 먼저 술을 올리고 “조상님네요! 이씨할매요! 김씨할매요! 이제 좋은 데로 가시소.”라고 고한 뒤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계원1리 횡계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달리 ‘조상’이라고도 칭하면서 안방 벽면에 부착된 시렁 위에 왼쪽부터 나란히 선대 조상 순으로 펼쳐 봉안한다. 귀신종이는 시준단지와 함께 봉안하는 것이 관례이다. 시준단지는 귀신종이를 봉안한 시렁 위에 함께 봉안한다. 귀신종이는 돌아가신 선대 조상의 첫 기제사 때 그 집 대주가 봉안한다. 한 번 봉안한 귀신종이는 기제사를 베푸는 동안에만 모신다. 신체는 더러워지거나 훼손되어도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는다. 기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게 되면 귀신종이는 조상의 묘로 모셔가서 태우거나 부정이 없는 정갈한 곳으로 모셔가서 태운다. 귀신종이에 대한 제의는 정례적인 기제사 외에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 그 집안 대주가 비손하며 행하기도 한다. 경주시 양남면 하서4리 진리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조상’이라고 칭한다. 이 마을에서는 가정에 따라 [조상종이](/topic/조상종이)를 옷 또는 천과 함께 당세기에 넣어 안방 [장롱](/topic/장롱) 위나 장롱 안에 모신다. 그러나 조상종이를 당세기에 넣지 않고 안방의 북쪽이나 서쪽 벽면 상단에 붙이기도 한다. 조상종이를 벽면에 붙일 때에는 한지로 만든 띠를 중앙부에 두 줄 붙여 고정시킨다.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낼 때에는 조상종이 앞에 제사상을 차려서 유교식으로 지낸다. 지방은 따로 쓰지 않는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주부가 정화수를 떠 놓고 비손하면서 안과태평을 기원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에서는 귀신종이를 달리 ‘구신종이’라 칭한다. 귀신종이는 시준단지 옆에 봉안한다. [시주](/topic/시주)단지는 안방의 시렁이나 장롱 위에 얹고 귀신종이는 시주단지 옆 벽면에 나란히 붙인다. 이 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3대까지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귀신종이를 붙일 때에는 왼쪽에 할아버지, 오른쪽에 할머니를 모신다. 귀신종이는 매해 섣달그믐날에 각 가정의 주부가 새것으로 교체한다. 교체된 신체는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기제사를 지낼 때에는 귀신종이 앞에 제물을 진설한다. 지방은 따로 써 붙인다. 기제사 외에 가정에 길흉사가 있으면 먼저 귀신종이에 고하기도 하며, 비손하면서 복을 기원하기도 한다. 울주군 온산읍 오산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조상종이’라고도 칭한다. 이 마을에서는 조상종이를 주로 3대까지 모신다. 조상의 신체는 한지를 직사각 형태로 접어서 안방의 서쪽 벽면이나 북쪽 벽면에 한지로 만든 띠로 고정시켜 부착한다. 조상종이는 장례를 치른 후 손 없는 날을 받아 보신다. 조상종이를 봉안할 때에는 먼저 봉안할 장소 앞에 제상을 차린 뒤 그 집 대주가 조상종이를 조상님이 좌정할 것을 고하며 벽면에 붙인 뒤 술을 올리고 재배한다. 조상종이는 [고비](/topic/고비)(考妣) 합사하여 모신다. 한 번 봉안된 조상종이는 이후 절대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둔다. 기제사는 귀신종이 앞에서 지낸다. 이 때 지방은 따로 쓴다. 기제사 외에 집안에 새식구를 맞이하거나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였을 때는 먼저 조상종이 앞에 먼저 고하고 예를 갖춘다. 또한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에는 조상종이 앞에 정화수와 간단한 제물을 진설한 뒤 주부가 비손한다. 조상종이는 장손에게 대물림하여 더 이상 조상종이를 모시지 않게 되면 그 집 대주가 조상종이를 떼어내어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부산광역시 [기장](/topic/기장)군 장안읍 효암리에서는 많은 가정에서 안방 벽면에 귀신종이를 봉안하고 있다. 귀신종이의 형태나 봉안하는 방식은 가정마다 상이하다. 어떤 가정에서는 귀신종이를 봉안한 벽면 위에 신위를 쓴 종이를 따로 붙여둔다. 어떤 가정에서는 띠를 만들지 않고 각기 풀로 벽면에 붙여 부착해 놓는다. 귀신종이를 봉안하는 시기는 주로 장례를 치른 뒤 3일째 되는 날이다. 귀신종이를 제작하거나 봉안하는 의례는 그 집 대주가 직접 주관한다. 귀신종이를 봉안할 때에는 먼저 귀신종이를 봉안할 장소 앞에 기제사와 동일하게 제물을 진설한 뒤 유교식으로 제를 올린다. 가정에 따라서는 열두 차례 술과 절을 올리기도 한다. 귀신종이가 낡거나 더러워지면 그해 정월 초하루나 섣달 그믐날을 택해 새것으로 교체한다. 교체할 때에는 달리 제의를 베풀지 않고 교체 사실을 먼저 고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교체된 귀신종이는 그 집 대주가 깨끗한 곳에 가서 좋은 곳으로 가시라는 염원을 아뢴 뒤 태운다. 귀신종이를 모시는 동안 [이사](/topic/이사)를 갈 경우에는 벽면에 부착된 귀신종이를 잘 거두어 깨끗한 상자에 모신 다음 대주가 조상신께 “조상님네요! 여기는 강입니다. 여기는 산모퉁이입니다. 여기는 도랑입니다. 조상님 건너갑시다.”라고 하며 이사 경로를 일일이 고하면서 모신다. 귀신종이모시기는 기제사와 명절 차례 외에도 집안에 대소사가 있으면 먼저 고하여 복을 빌고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정화수를 떠놓고 비손한다. 귀신종이를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었을 경우 그 집 대주가 마지막 기제사 후 귀신종이를 떼어내어 손 없고 맑은 곳에서 태운다.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학리 역시 많은 가정에서 현재까지 귀신종이를 모시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서는 [삼우제](/topic/삼우제)를 지내고 나서 귀신종이를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전에는 3년 [탈상](/topic/탈상) 후 길일을 잡아 봉안 하였다고 한다. 귀신종이를 봉안할 때에는 기제사와 동일하게 제물을 진설하고 제를 올린다. 그런 다음 그 집 대주가 직접 만든 귀신종이를 선대 귀신종이와 나란히 안방 벽면에 부착한다. 귀신종이는 한지를 직사각 형태로 접는다. 귀신종이 안쪽에는 신위를 써 두기도 한다. 한 번 봉안한 귀신종이는 그대로 둔다. 가정에 따라 귀신종이가 낡아 더러워지면 섣달그믐날에 새것으로 교체하기도 한다. 교체한 귀신종이는 조상의 묘에 가서 태우거나 손 없는 방향을 가려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이 마면에서는 기제사나 명절 차례 외에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과일과 술 등으로 간단히 제물을 마련하여 진설한 뒤 고할 뿐 달리 비손을 행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경남 거제시 옥포2동 조사마을에서는 귀신종이를 달리 ‘거장’이라고 칭한다. 거장은 부산시 기장군 해안지역 일대에서 전승되는 귀신종이와 형태나 성격이 동일하다. 그러나 동일 가정에서 모시는 경우라 하더라도 신체의 크기와 두께가 각기 다르다. 신체별로 신위를 쓰는 위치도 달라 신체 앞면에 쓰기도 하며 신체 안쪽에 쓰기도 한다. 거제와 통영지역의 거장은 부산시 기장군지역의 귀신종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의 크기가 작고 두께가 얇으며 거장 전체를 가리는 덮개가 함께 부착되어 있다. 기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낼 때 거장 앞에 제사상을 차려 유교식으로 모신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그 집 주부가 정화수를 떠놓고 안과태평과 재수대통을 비손하면서 기원한다. 거장을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면 그 집 대주가 거장을 떼어낸 뒤 깨끗한 곳에서 태운다. | 참고문헌 | 한국의 향토신앙 (장주근, 을유문화사, 1977) 三國志, 三國史記, 동남해안지방의 전통적 [조상숭배](/topic/조상숭배)신앙 연구 (황경숙, 한국문학논총 32, 2002) 동해안지역의 ‘귀신동이’․‘귀신당세기’․‘귀신종이’신앙 연구 (황경숙, 한국민족문화 21, 2003) 한국의 가정신앙-하 (김명자 외, 민속원, 2005) 한국의 가정신앙-경남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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