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이월 초하룻날에 정월 열나흗날 세운 볏가릿대 앞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의 진솔한 염원을 담아 제(祭)를 지내고 노는 풍농기원 세시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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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이인화 |
정의 | 이월 초하룻날에 정월 열나흗날 세운 볏가릿대 앞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의 진솔한 염원을 담아 제(祭)를 지내고 노는 풍농기원 세시의례. | 정의 | 이월 초하룻날에 정월 열나흗날 세운 볏가릿대 앞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의 진솔한 염원을 담아 제(祭)를 지내고 노는 풍농기원 세시의례. | 내용 | 볏가릿대는 벼를 베어서 길게 세워 쌓거나 볏단을 차곡차곡 위로 쌓은 더미인 ‘[볏가리](/topic/볏가리)(낟가리)’에서 나온 말이다. 볏가릿대는 긴 나뭇대(竿) 높이만큼 풍년이 들어 볏가리를쌓게 해 달라는 기원의 의미에서 세운, 잘 자란 벼를 상징하는 풍년기원 우주목(宇宙木)이다. 이런 세시기원 의례이던 볏가리제는 풍년을 다지는 제의로 변화했다.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마을](/topic/마을)의 공동[우물](/topic/우물)에 길이 10m 정도의 대나무·소나무 등에 끝부분을 제거하지 않고 다듬어 우물에 세운 뒤 동아줄로 넘어지지 않게 세 갈래로 매어 놓고, [볏짚](/topic/볏짚)으로 오쟁이를 만들어 [오곡](/topic/오곡)(쌀, [보리](/topic/보리), 콩, 조, [기장](/topic/기장))을 각각 넣어 나무 위에 매달아 음력 이월 초하룻날 동네 주민들이 풍물을 치며 세워 놓은 볏가릿대 앞에서 볏가리제를지낸다. 볏가리제는 마을의 고령자가 팥떡시루, 돼지고기, 삼색실과 등 제물을 차려 놓고 술잔을 올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축문](/topic/축문)을 읽었다. 그런 다음 볏가릿대 누이기를 한다. 이때 [농악](/topic/농악)을 한바탕 치고 난 뒤 꼭대기에 매달린 씨오쟁이에 넣은 벼·보리·콩·[수수](/topic/수수)·조 등 오곡이 물에 불었으면 “쌀 텄다, 쌀 텄다” 하고 소리를 지르며 풍년이들 것을점치고, 오곡 가운데에서도 잘 불은 [곡물](/topic/곡물)을 심어 풍년을 기약하였다. 그런 다음 동아 밧줄을 [가마니](/topic/가마니)에 담아 광에 들이면서 “천석이요, 만석이요”하며 풍년 들기를 기원하였다. | 내용 | 볏가릿대는 벼를 베어서 길게 세워 쌓거나 볏단을 차곡차곡 위로 쌓은 더미인 ‘[볏가리](/topic/볏가리)(낟가리)’에서 나온 말이다. 볏가릿대는 긴 나뭇대(竿) 높이만큼 풍년이 들어 볏가리를쌓게 해 달라는 기원의 의미에서 세운, 잘 자란 벼를 상징하는 풍년기원 우주목(宇宙木)이다. 이런 세시기원 의례이던 볏가리제는 풍년을 다지는 제의로 변화했다.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마을](/topic/마을)의 공동[우물](/topic/우물)에 길이 10m 정도의 대나무·소나무 등에 끝부분을 제거하지 않고 다듬어 우물에 세운 뒤 동아줄로 넘어지지 않게 세 갈래로 매어 놓고, [볏짚](/topic/볏짚)으로 오쟁이를 만들어 [오곡](/topic/오곡)(쌀, [보리](/topic/보리), 콩, 조, [기장](/topic/기장))을 각각 넣어 나무 위에 매달아 음력 이월 초하룻날 동네 주민들이 풍물을 치며 세워 놓은 볏가릿대 앞에서 볏가리제를지낸다. 볏가리제는 마을의 고령자가 팥떡시루, 돼지고기, 삼색실과 등 제물을 차려 놓고 술잔을 올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축문](/topic/축문)을 읽었다. 그런 다음 볏가릿대 누이기를 한다. 이때 [농악](/topic/농악)을 한바탕 치고 난 뒤 꼭대기에 매달린 씨오쟁이에 넣은 벼·보리·콩·[수수](/topic/수수)·조 등 오곡이 물에 불었으면 “쌀 텄다, 쌀 텄다” 하고 소리를 지르며 풍년이들 것을점치고, 오곡 가운데에서도 잘 불은 [곡물](/topic/곡물)을 심어 풍년을 기약하였다. 그런 다음 동아 밧줄을 [가마니](/topic/가마니)에 담아 광에 들이면서 “천석이요, 만석이요”하며 풍년 들기를 기원하였다. | 역사 | [볏가리](/topic/볏가리)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의례로, 정월대보름을 중요하게 인식한 고대부터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 [상원](/topic/상원)(上元) [화적](/topic/화적)(禾積)·[화간](/topic/화간)(禾竿)조에서 “시골 농가에서는 대보름 하루 전에 짚을 묶어 큰 깃대 형상[纛狀]으로 만들어 그 안에 禾[벼]·黍[[기장](/topic/기장)]·稷[피]·粟[조]의 이삭을 집어넣어 싸고 [목화](/topic/목화)를 장대 꼭대기에 매단다. 이것을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늘어뜨려 고정시키는데, 이를 화적(禾積, 노적가리)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해의 풍년을 비는 풍속이다. 산간지방에서는 대보름 하루 전날에 [가지](/topic/가지)가 많은 나무를 골라서 [외양간](/topic/외양간) 뒤에 세우고 곡식의 이삭과 목화를 걸어 둔다. 동네 아이들이 보름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세워 둔 나무를 둘러싸고 서서 돌며 노래를 부르고 풍년을 기원하는데, 해가 뜨면 그만둔다. …… 민간에서 장대 끝에 벼이삭을 달아맨 화간(禾竿, 볏가릿대)을 세우는 일도 이것과 같다”고 하였고, 권용정(1801~?)은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 부(附) 세시잡영(歲時雜詠) 이란 7언시에서 “10자의 긴 장대 사람처럼 서 있고/꼭대기에 묶인 풀 바람에 날리네/ 부잣집 사들인 땅 대부분 기름지니/해마다 곡식이 잘 익기를 기원하네/ 달구지에 실어 온 볏단 집안에 가득하여/닭이나 개조차 먹을 만큼 넉넉하네/ 가난한 집 [송곳](/topic/송곳) 꽂을 땅도 없으니/[지붕](/topic/지붕) 위에 어떻게 장대를 세우리오/ 부잣집 닭과 개에게도 미치지 못하니/종일토록 일을 해도 먹지를 못하네/ 눈 깜짝할 사이에 입장이 바뀐다네/ 지난해 동쪽 집에 세운 장대가/올해 다시 서쪽 집 지붕에 있네/ 해마다 장대는 세우고 내리지만/평생 바라는 일 뜻대로 되지 않네/ 어느 때에나 다시 균전법이 행해져/[마을](/topic/마을)마다 집집마다 장대 높이 세울까” 하였다. 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우리나라 풍속이 귀신을 신봉하여 화간을 만들고 지전(紙錢)을 매달아……”라고 하여 화간, 화적, 도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또『 동국세시기』에서 “정월대보름날에 세웠던 화간에서 벼를 내려 흰 떡을 만든다”라고 하였고, 유득공(柳得恭, 1749~?)이 편찬한 『[경도잡지](/topic/경도잡지)(京都雜志)』의 이월 초하룻날 조에 “정월보름날 세웠던 볏가릿대(화간)를 내려 솔잎을 겹겹으로 깔아 떡을 만들어 노비들을 먹인다”라는 기록이 있어 볏가리제가 이루어지는 광경은 파악되지 않으나 이월 초하룻날이 시농일(始農日)에 일꾼들에게 떡을 해 먹고 놀도록 하면서 기원[고사](/topic/고사)도 지낸 것으로 보인다. 송석하는 1934년에 발표한 「풍신고(風神考)-부(附) 화간고(禾竿考)」에서 볏가릿대는 현재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농경의례로, 한강이남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입간민속(立竿民俗)이라고 하였다. 송석하에 따르면 볏가릿대[禾竿]는 정월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기다란 장대 위에 짚꾸러미를 달고 여기에 통대를 가늘게 쪼갠 것을 축축 늘어뜨리고, 통대 조각에는 [백지](/topic/백지)(白紙)를 길고 좁게 잘라 한쪽만 잔칼질하여 찬찬히 감아 둔다. 이 민속은 화상(禾狀)의 물태(物態)를 만들어 두고 이와 같이 풍년이 되어 달라는것과 조해(鳥害)가 없도록, 즉 기조(忌鳥)하는 이중신앙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자(李耔, 1480~1533)의 『음애일기(陰崖日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의「 巨濟島の立竿民俗」등에서 볏가릿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처럼 볏가리제는 [노비일](/topic/노비일)(奴婢日)인 이월 초하룻날 볏가릿대에 의례를 행하는 [유감주술](/topic/유감주술)적 풍농기원 의례로, 벼이삭을 내려 송편(松餠)을 빚어 종들에게 나누어 주며 놀던 풍속에서 유래한다. 큰 장대 위에 곡식을 매달거나 깃발을 매다는 것은 농작물이 그렇게 큰 키로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갈망하는 것이다. 권용정의 『세시잡영』에는 화간을 부농가에서만 세운 것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화간은 부(富)의 상징이기도 했다. | 역사 | [볏가리](/topic/볏가리)제는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의례로, 정월대보름을 중요하게 인식한 고대부터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topic/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 [상원](/topic/상원)(上元) [화적](/topic/화적)(禾積)·[화간](/topic/화간)(禾竿)조에서 “시골 농가에서는 대보름 하루 전에 짚을 묶어 큰 깃대 형상[纛狀]으로 만들어 그 안에 禾[벼]·黍[[기장](/topic/기장)]·稷[피]·粟[조]의 이삭을 집어넣어 싸고 [목화](/topic/목화)를 장대 꼭대기에 매단다. 이것을 집 곁에 세우고 새끼를 늘어뜨려 고정시키는데, 이를 화적(禾積, 노적가리)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해의 풍년을 비는 풍속이다. 산간지방에서는 대보름 하루 전날에 [가지](/topic/가지)가 많은 나무를 골라서 [외양간](/topic/외양간) 뒤에 세우고 곡식의 이삭과 목화를 걸어 둔다. 동네 아이들이 보름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세워 둔 나무를 둘러싸고 서서 돌며 노래를 부르고 풍년을 기원하는데, 해가 뜨면 그만둔다. …… 민간에서 장대 끝에 벼이삭을 달아맨 화간(禾竿, 볏가릿대)을 세우는 일도 이것과 같다”고 하였고, 권용정(1801~?)은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 부(附) 세시잡영(歲時雜詠) 이란 7언시에서 “10자의 긴 장대 사람처럼 서 있고/꼭대기에 묶인 풀 바람에 날리네/ 부잣집 사들인 땅 대부분 기름지니/해마다 곡식이 잘 익기를 기원하네/ 달구지에 실어 온 볏단 집안에 가득하여/닭이나 개조차 먹을 만큼 넉넉하네/ 가난한 집 [송곳](/topic/송곳) 꽂을 땅도 없으니/[지붕](/topic/지붕) 위에 어떻게 장대를 세우리오/ 부잣집 닭과 개에게도 미치지 못하니/종일토록 일을 해도 먹지를 못하네/ 눈 깜짝할 사이에 입장이 바뀐다네/ 지난해 동쪽 집에 세운 장대가/올해 다시 서쪽 집 지붕에 있네/ 해마다 장대는 세우고 내리지만/평생 바라는 일 뜻대로 되지 않네/ 어느 때에나 다시 균전법이 행해져/[마을](/topic/마을)마다 집집마다 장대 높이 세울까” 하였다. 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우리나라 풍속이 귀신을 신봉하여 화간을 만들고 지전(紙錢)을 매달아……”라고 하여 화간, 화적, 도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또『 동국세시기』에서 “정월대보름날에 세웠던 화간에서 벼를 내려 흰 떡을 만든다”라고 하였고, 유득공(柳得恭, 1749~?)이 편찬한 『[경도잡지](/topic/경도잡지)(京都雜志)』의 이월 초하룻날 조에 “정월보름날 세웠던 볏가릿대(화간)를 내려 솔잎을 겹겹으로 깔아 떡을 만들어 노비들을 먹인다”라는 기록이 있어 볏가리제가 이루어지는 광경은 파악되지 않으나 이월 초하룻날이 시농일(始農日)에 일꾼들에게 떡을 해 먹고 놀도록 하면서 기원[고사](/topic/고사)도 지낸 것으로 보인다. 송석하는 1934년에 발표한 「풍신고(風神考)-부(附) 화간고(禾竿考)」에서 볏가릿대는 현재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농경의례로, 한강이남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입간민속(立竿民俗)이라고 하였다. 송석하에 따르면 볏가릿대[禾竿]는 정월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기다란 장대 위에 짚꾸러미를 달고 여기에 통대를 가늘게 쪼갠 것을 축축 늘어뜨리고, 통대 조각에는 [백지](/topic/백지)(白紙)를 길고 좁게 잘라 한쪽만 잔칼질하여 찬찬히 감아 둔다. 이 민속은 화상(禾狀)의 물태(物態)를 만들어 두고 이와 같이 풍년이 되어 달라는것과 조해(鳥害)가 없도록, 즉 기조(忌鳥)하는 이중신앙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자(李耔, 1480~1533)의 『음애일기(陰崖日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의「 巨濟島の立竿民俗」등에서 볏가릿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처럼 볏가리제는 [노비일](/topic/노비일)(奴婢日)인 이월 초하룻날 볏가릿대에 의례를 행하는 [유감주술](/topic/유감주술)적 풍농기원 의례로, 벼이삭을 내려 송편(松餠)을 빚어 종들에게 나누어 주며 놀던 풍속에서 유래한다. 큰 장대 위에 곡식을 매달거나 깃발을 매다는 것은 농작물이 그렇게 큰 키로 성장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갈망하는 것이다. 권용정의 『세시잡영』에는 화간을 부농가에서만 세운 것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화간은 부(富)의 상징이기도 했다. | 지역사례 | 조선시대 문헌과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하여 발행한 도별『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에서 볏가릿대는 [화간](/topic/화간), [화적](/topic/화적), [도간](/topic/도간), 노적, 유짓대, [유지지](/topic/유지지), [볏가리](/topic/볏가리), 유지방, 유지봉, 유조지,오지봉, 유주지, 유주뱅이, 유두뱅이, 유구지, 햇대, 보름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볏가리제는 이름에 차이가 있지만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전승되었다. 특히 충남 당진군, 서산시, 태안군 지역에서는 현재도 많이 재현되며 경북지방에서는 이 풍속이 적게 파악된다. 송석하는 「풍신고」에서 볏가리제는 현재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농경의례로, 한강이남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충남 당진군 고대면 옥현리는 1995년까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아침에 [마을](/topic/마을) 대동샘에다 대나무 끝에 꿩의 꼬리털을 달고 짚을 뭉쳐 매단 볏가릿대를 [농악](/topic/농악)대가 동반한 가운데 세우고 이월 초하룻날 [고사](/topic/고사)를 지낸 다음 쓰러뜨렸다. 또한 충남 당진군 당진읍 대덕리 볏가릿대 세우기는 정월 열나흗날 큰 소를 먹이는 집에 가서 동아줄을 틀어 볏가릿대를 세우고 이월 초하룻날 볏가릿대를 쓰러뜨렸다. 이때 볏가릿대 세울 때 쓴 동아줄을 잘라 섬에 담아 부잣집광에 넣어 주었으며, 동아줄 섬을 들이길 기다려 “볏섬 들어온다”라고 소리쳤다. 볏가릿대는 웬만한 집에서 다 세웠고, 이 동네에서도 10여 개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술 조사 때문에 집집마다 세우다가 못 세우고 공동[우물](/topic/우물)에만 세웠다. 현재 볏가릿대는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화정, 당진군 송악읍 기지시리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 행사장, 서산시 대산읍 환성리3구, 대산읍 운산리5구 횟개마을, 인지면야당리 등의 마을 한복판에 을씨년스럽게 재현되고 있다. 볏가릿대는 농사를 많이 짓는 대농가마다 세우고 [이월 초하루](/topic/이월초하루) 볏가릿대를 하는 날에 그 집에서 술과 떡, 과일 같은 것을 푸짐하게 내어 [머슴](/topic/머슴)이나 [소작](/topic/소작)인들이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5구 횟개 볏가릿대는 과거 세 마을에 세웠으나 1950년에 중단되어 1990년 마을회관 앞 논에서 [대추](/topic/대추), 밤, 곶감, 배, [사과](/topic/사과), [시루떡](/topic/시루떡), 술, [북어](/topic/북어) 등의 제물을 차려 놓고 재현되었다. 당진읍 구룡리는 1991년 당진군 농촌지도소에서 지역[농업](/topic/농업)개발 시범지역으로 선정하여마을 주민의 화합 도모 및 농촌의 고유 [민속놀이](/topic/민속놀이)를 되살리고자 백승환 등에게 자문해 재현하게 되었다. 서산시 음암면 도당6리 바위백이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아침 일찍 젊은 사람들이 산에 가서 소나무나 대나무를 베어다 맨 꼭대기 [가지](/topic/가지)만 남기고 잔가지를 쳐서 짚으로 옷을 입힌다. 그리고 쌀·[수수](/topic/수수)·콩 등 곡식의 씨앗을 담은 [주머니](/topic/주머니)를 매달아 동아줄로 고정시킨다. 동아줄은 위에서부터 세 가닥으로 묶고 줄을 너덜너덜하게 늘어뜨려 땅에 고정시킨다. 볏가릿대를 세우고 나면 떡, 술, 삼색과일, 돼지머리, 나물 등을 장만해 볏가릿대 앞에 상을 차리고 농악패의 [상쇠](/topic/상쇠)가 나와서 제사를 지낸다. 볏가릿대를 세우는 장소는 동네의 부잣집 근처이며, 볏가릿대를 세우는 날에는 부잣집에서 술과 떡 등 음식을 장만해 동네사람들을 대접한다. 정월대보름날 세워 둔 볏가릿대는 이월 초하룻날 쓰러트린다. 이처럼 당진·서산 지역 볏가릿대는 평야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월대보름날 농토가 많은 부농 등 개인 제의부터 대동샘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자연마을 단위로 전승되어 오다가최근에는 이(里) 단위로 마을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참고문헌 | 충청남도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東國輿地勝覽, 星湖僿說, 歲時雜詠, 巨濟島の立竿民俗 (秋葉隆, 조선민속 1, 조선민속학회, 1933) 풍신고 (송석하, 진단학보 1, 진단학회, 1934) 청주지 (청주시지편찬위원회, 1961) 당진의 민간신앙 (이인화, 당진문화원, 1996) 한국의 문화코드 열다섯 [가지](/topic/가지) (김열규, 도서출판 부키, 1997) 충청북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볏가릿대고[禾竿考]-내포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이관호, 생활문물연구 4, 국립민속박물관, 2002) 조선대세시기 1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원, 2003) 한국세시풍속[사전](/topic/사전)-정월 (국립민속박물관, 2004) 충남 내포지역 [마을](/topic/마을)제당의 민속지리 (이인화, 민속원, 2006) 궁중 [내농작](/topic/내농작)과 농가 내농작의 의미와 기능-궁중풍속과 민속의 관계를 생각하며 (배영동, 한국민속학 45, 한국민속학회, 2007) | 지역사례 | 조선시대 문헌과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하여 발행한 도별『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에서 볏가릿대는 [화간](/topic/화간), [화적](/topic/화적), [도간](/topic/도간), 노적, 유짓대, [유지지](/topic/유지지), [볏가리](/topic/볏가리), 유지방, 유지봉, 유조지,오지봉, 유주지, 유주뱅이, 유두뱅이, 유구지, 햇대, 보름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볏가리제는 이름에 차이가 있지만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전승되었다. 특히 충남 당진군, 서산시, 태안군 지역에서는 현재도 많이 재현되며 경북지방에서는 이 풍속이 적게 파악된다. 송석하는 「풍신고」에서 볏가리제는 현재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농경의례로, 한강이남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충남 당진군 고대면 옥현리는 1995년까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아침에 [마을](/topic/마을) 대동샘에다 대나무 끝에 꿩의 꼬리털을 달고 짚을 뭉쳐 매단 볏가릿대를 [농악](/topic/농악)대가 동반한 가운데 세우고 이월 초하룻날 [고사](/topic/고사)를 지낸 다음 쓰러뜨렸다. 또한 충남 당진군 당진읍 대덕리 볏가릿대 세우기는 정월 열나흗날 큰 소를 먹이는 집에 가서 동아줄을 틀어 볏가릿대를 세우고 이월 초하룻날 볏가릿대를 쓰러뜨렸다. 이때 볏가릿대 세울 때 쓴 동아줄을 잘라 섬에 담아 부잣집광에 넣어 주었으며, 동아줄 섬을 들이길 기다려 “볏섬 들어온다”라고 소리쳤다. 볏가릿대는 웬만한 집에서 다 세웠고, 이 동네에서도 10여 개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술 조사 때문에 집집마다 세우다가 못 세우고 공동[우물](/topic/우물)에만 세웠다. 현재 볏가릿대는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화정, 당진군 송악읍 기지시리 [줄다리기](/topic/줄다리기) 행사장, 서산시 대산읍 환성리3구, 대산읍 운산리5구 횟개마을, 인지면야당리 등의 마을 한복판에 을씨년스럽게 재현되고 있다. 볏가릿대는 농사를 많이 짓는 대농가마다 세우고 [이월 초하루](/topic/이월초하루) 볏가릿대를 하는 날에 그 집에서 술과 떡, 과일 같은 것을 푸짐하게 내어 [머슴](/topic/머슴)이나 [소작](/topic/소작)인들이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5구 횟개 볏가릿대는 과거 세 마을에 세웠으나 1950년에 중단되어 1990년 마을회관 앞 논에서 [대추](/topic/대추), 밤, 곶감, 배, [사과](/topic/사과), [시루떡](/topic/시루떡), 술, [북어](/topic/북어) 등의 제물을 차려 놓고 재현되었다. 당진읍 구룡리는 1991년 당진군 농촌지도소에서 지역[농업](/topic/농업)개발 시범지역으로 선정하여마을 주민의 화합 도모 및 농촌의 고유 [민속놀이](/topic/민속놀이)를 되살리고자 백승환 등에게 자문해 재현하게 되었다. 서산시 음암면 도당6리 바위백이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아침 일찍 젊은 사람들이 산에 가서 소나무나 대나무를 베어다 맨 꼭대기 [가지](/topic/가지)만 남기고 잔가지를 쳐서 짚으로 옷을 입힌다. 그리고 쌀·[수수](/topic/수수)·콩 등 곡식의 씨앗을 담은 [주머니](/topic/주머니)를 매달아 동아줄로 고정시킨다. 동아줄은 위에서부터 세 가닥으로 묶고 줄을 너덜너덜하게 늘어뜨려 땅에 고정시킨다. 볏가릿대를 세우고 나면 떡, 술, 삼색과일, 돼지머리, 나물 등을 장만해 볏가릿대 앞에 상을 차리고 농악패의 [상쇠](/topic/상쇠)가 나와서 제사를 지낸다. 볏가릿대를 세우는 장소는 동네의 부잣집 근처이며, 볏가릿대를 세우는 날에는 부잣집에서 술과 떡 등 음식을 장만해 동네사람들을 대접한다. 정월대보름날 세워 둔 볏가릿대는 이월 초하룻날 쓰러트린다. 이처럼 당진·서산 지역 볏가릿대는 평야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월대보름날 농토가 많은 부농 등 개인 제의부터 대동샘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자연마을 단위로 전승되어 오다가최근에는 이(里) 단위로 마을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참고문헌 | 충청남도 [세시풍속](/topic/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東國輿地勝覽, 星湖僿說, 歲時雜詠, 巨濟島の立竿民俗 (秋葉隆, 조선민속 1, 조선민속학회, 1933) 풍신고 (송석하, 진단학보 1, 진단학회, 1934) 청주지 (청주시지편찬위원회, 1961) 당진의 민간신앙 (이인화, 당진문화원, 1996) 한국의 문화코드 열다섯 [가지](/topic/가지) (김열규, 도서출판 부키, 1997) 충청북도 세시풍속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볏가릿대고[禾竿考]-내포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이관호, 생활문물연구 4, 국립민속박물관, 2002) 조선대세시기 1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원, 2003) 한국세시풍속[사전](/topic/사전)-정월 (국립민속박물관, 2004) 충남 내포지역 [마을](/topic/마을)제당의 민속지리 (이인화, 민속원, 2006) 궁중 [내농작](/topic/내농작)과 농가 내농작의 의미와 기능-궁중풍속과 민속의 관계를 생각하며 (배영동, 한국민속학 45, 한국민속학회,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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